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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문제는 창작이다 - 그들은 어떻게 창작하는가 : 이유정

“신인이라고? 새로운 것을 보여 줄
10년 준비된 신인이지”
 
글 | 이재식 기자 (lee@Qcomic.com)  사진 | JAY’S STUDIO 

 
이유정 | 94년 단편 ‘혈류’(주간만화)로 데뷔해, <와일드 스트레스> <요동의 뱀파이어> <열정의 투 페이스>(이상 <미스터 블루>) 등을 선보이며 단숨에 주목을 끌었다. 97년 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한국의 대표 만화가 30인전’에 초대 받았고, 96년 일본 후타바샤에서 주최한 아시아 만화공모전에서 ‘헤어’로 입선했다. ‘러브머신’(1995년) ‘지구별 씨받이’(1996년) ‘집으로’(1997년) ‘얘네들은 악당이다’(1998년) ‘웃긴 걸(Girl)’(1998년) ‘나 같은 쓰레기조차도’(2000년) 등 여러 단편을 발표했다. <미나>(영점프), <파인애플>(빅점프), <변태가 되자>(기가스), <Moon>(코믹스투데이) 등 연재작이 잡지 폐간으로 끝을 못 본 경우가 많다.
 
 
고단샤 공모전 당선과 연재 지면 따기
 
만화가 이유정의 이름은 세 명으로 달리 불릴 수 있다. 먼저 <요동의 뱀파이어> <아시안> <가물치전>의 이유정을 모르는 독자는 드물 것이다. 다른 이는 <와우>의 순정작가로 동명이인이다. 그럼 나머지 한 사람은? 마지막 남은 사람은 신인작가 이유정. 이 신인은 단편 ‘헤어’를 비롯해 ‘러브머신’ ‘집으로’ 등을 통해 박흥용 이후 가장 수준 높은 단편을 보여 준 것으로 평가되는 작가이다. 그의 단편 중 백미로 꼽히는 ‘헤어’는 1996년 일본 후타바샤(雙葉社)가 주최한 아시아 지역 만화공모전에서 최고상을 수상했다. 가만 그런데…?! 이유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맨 처음과 나중의 이유정이 같은 사람임을 어렵지 않게 눈치 챘을 것이다. 그럼 왜 이유정이 신인작가로 불릴까. 데뷔한 지 10년 넘게 줄기차게 작품 활동을 이어온 작가를 두고 신인이라고 하는 건 무슨 억지일까.
 

밑그림 그리기- 데뷔 10년차에 신인 공모전에 도전
해를 등지고 놀며 그림자 속의 자신을 찾는다. ‘말 없는 아이들에 대한 보고서’의 주인공마냥 이유정도 어린 시절 유난히 말이 없었다. 책 읽고 혼자 상상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것이 일이 되었고 끝 간 데 없이 계속될 것이다.이유정은 적어도 일본에서 신인작가로 분류돼 있다. 고단샤의 <영매거진> 편집부에서 데뷔를 준비 중인 수십 명의 작가 리스트 중에 그의 이름이 끼어 있다. 그리고 빠르면 오는 5월 중 이 잡지에 3회짜리 단편을 발표하게 된다.
이유정이 일본 무대에 신인으로 도전하게 된 것은 2003년 고단샤의 만화공모전인 치바 테츠야상에서 수상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는 이 공모전에서 ‘즉시 투입 가능한 전력을 갖춘 작가’라는 평을 받으며 장려상을 수상했다. 예정된 수순인냥 편집부는 단편을 주문했는데, 3회 분량이 할당된 것이다. 이 단편이 좋은 반응을 얻게 되면 연재 지면을 얻게 된다. 이는 이유정이 일본에서 이루고자 하는 1차 목표이다. 얼른 봐도 이유정이 걷고 있는 길은 일본 만화잡지의 전형적인 신인 등용 과정이다.
대개 공모전이라고 하면 완성된 원고를 공모 기간 안에 출품해 공개경쟁을 하는 방식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 잡지사의 공모전은 전혀 다른 의미이다. 편집부는 수준 있는 작품이 눈에 띄면 공모전에 응모해 볼 것을 추천한다. 또 공모전에서 당선될 수 있는 요건들을 알려주며 가이드 역할을 한다. 공모전은 연 단위의 회사 통합 공모전부터 잡지마다 월 단위로 열리는 콘테스트까지 다양해 상시 공모체제라고 보면 된다. 따라서 작가는 편집부를 방문할 때 펜터치까지 마무리한 원고를 준비할 필요가 없어진다. 데생 원고를 보여 주고 편집부와 대화할 ‘거리’를 만드는 게 첫 숙제가 된다.  
이유정이 공모전에 당선되기까지의 과정 또한 일본의 신인작가들이 일반적으로 거치는 공모전 통과의례를 밟아 왔다. 2002년 10월, 이유정은 동료 만화가 변병준 씨와 함께 일본 만화편집부를 노크하게 된다. 이미 일본에서 공모전 수상 경력이 있는 변 씨가 일본 진출을 제안해 따라 나선 길이다. 고단샤 <영매거진> 편집부를 포함해 세 군데 편집부를 방문했는데 다행히 모두 좋은 반응을 보여 줬다.
일본 편집부에 보낼 3회 단편 ‘그녀는 전교 꼴등’ 콘티. 당초 제목이나 구상은 ‘그녀는 전교 1등’이던 것이 ‘꼴등’이 된 것은 일본 편집부와 6개월 간 의견을 주고 받은 결과이다. 편집부와 대화하는 용도이다 보니 콘티가 꽤 세밀하다. “작품을 완성하면 단편으로 실을 수 있다.” “공모전에 내면 수상권에 들 것 같다. 공모전에 당선되면 데뷔하기에 유리한 면이 있다.” 가장 인상적인 말이 “이 정도 작품이면 일본에서 생계는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잇따른 잡지 폐간으로 국내에서 연재 지면이 하나도 없는 처지에 무척 고무적인 평이었다. 기대대로 작품은 당선되었다. 제목은 ‘말 없는 아이들에 대한 보고서’로 34쪽 분량. 이 과정에서 당선 말고도 편집부가 원하는 작품이나, 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에 대해 직접 확인하는 소득을 챙겼다. 고단샤의 경우 만화를 보고 골치 아픈 것은 배격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한번 더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라면 곤란하다는 것. 특이한 것보다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을 쉽고 단순하게 풀어낼 것을 주문 받았다. 여기에 감동이 있으면 한층 좋은 작품이 될 수 있는 정도로 본다. 또 “연재작의 도입 단계나, 단편의 경우 폭력적이거나 섹스어필하는 내용으로 시선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다.”는 기술적인 처방도 들었다. 국내에서 심의문제로 표현에 갈증을 느껴오던 터라 속 시원한 격려에 다름 아니었다. 공모전 당선작에도 적극적인 성 묘사가 있는데, 한국 사정에 밝은 심사위원장 치바 테츠야 씨는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표현의 자유를 맘껏 누려본 작품”이란 평을 내기도 했다.  
 
 
콘티짜기, 데생하기-콘티에만 6개월, 데생은 단번에 통과      
단편을 준비하면서 곧 새로운 장벽과 맞닥뜨리게 되었는데, 일본 무대에 서게 된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듯했다. 거리나 언어의 문제로 편집부와 소통이 쉽지 않아 작품 진행이 너무 더딘 것이다. 작품 구상을 제안하면 번번이 편집부의 ‘검토’에 걸렸고, 소통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편집부에서 주로 지적하는 것은 이야기 설정과 흐름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면 고등학교 선생님이 오토바이를 타고 등교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일본 실정에 맞지 않고 이런 일이 있다면 사회적으로 상당히 물의를 일으킬 것”이라는 지적이 따랐다.   
작품을 고치고, 새로 제안하기를 6개월 가량 되풀이 한 끝에 어렵게 콘티가 확정됐다. 이때가 올 2월 중순경이었다. 제목은 ‘그녀는 전교 꼴등’. 제일 처음 제안한 구상이 ‘그녀는 전교 1등’이란 제목이었는데, ‘전교 1등’이 ‘전교 꼴등’으로 180도 바뀔 만큼 설정과 이야기도 완전히 뜯어 고쳐졌다. 이런 결과는 일본 편집부의 작품 수정 요구가 원인이긴 하지만 이유정식의 대응방식과 맞물린 결과이다. 편집부의 세세한 검토에 대해 이유정은 하나하나 수정하는 대신 큰 범위에서 작품의 설정이나 방향을 바꿔 버린다. 담당기자, 편집회의, 편집장 등을 거치며 저마다 조금씩 다른 의견을 모두 수용할 바에는 이런 식이 오히려 나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콘티와 비교해 본 데생 원고(오른쪽 그림). 데생 그림과 크게 차이가 안 날 정도로 콘티에서 인물이나 동작 묘사를 자세하게 한다. 일단 콘티에 대한 검토가 끝나면 다음 단계는 데생이다. 물론 데생도 편집부의 꼼꼼한 검토가 따른다. 이유정은 데생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다. 일본측 또한 이유정의 그림에 대해서 높이 평가한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힌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의 경우 “여자 캐릭터가 예쁜데 한번 쓰기엔 아까우니 연재가 되면 꼭 주인공으로 살려 보라.”는 격려도 있었다. 그가 실전에서 겪은 편집부는 “그림 보는 눈이 정확해 작가에게 설득력을 얻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긴장관계로 데생에 대해 다시 고민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국내에서 잡지 1회 연재 원고를 마감하는 시간은 1주일 남짓인데 비해 일본 작품의 경우 데생만 1주일 이상 걸리는 차이는 이를 잘 말해 주는 대목이다. 3회 전분량을 한꺼번에 넘긴 데생은 단번에 통과되었다. 데생을 시작한 지 한 달가량 되던 3월 중순이었다. 이유정이 일본 편집부와 대화하는 중간에는 현지 대리인이 있다. 이 역할은 현지 유학생인 이현석 씨가 담당하고 있다. 이 씨는 <떴다 킬러> <미림반점 수호열전> 같은 작품의 스토리를 썼던 만화 전문가이다. 덕분에 대화 창구 역할뿐 아니라 작품에 대한 적절한 지적도 해주고 있다. 이유정의 작품 구상이나 스토리에 대한 담당기자와 편집회의의 논의 결과는 이현석 씨가 양쪽을 번갈아 실황처럼 중계한다. 콘티나 데생의 경우 문제가 되는 장면을 스캔하고 지적 사항을 메모해 보내 온다. 작가와 편집부 사이에서 이현석 씨가 보는 일본 편집부의 역할은 이렇다.
“일본 진출에서 가장 힘든 점은 상상을 초월하는 편집부의 ‘지도’이다. 언어장벽의 문제도 여기서 등장한다. 그러나 이는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마땅히 거쳐야 할 과정으로 보인다. 비교를 하면 한국의 편집부의 경우 역할이 지나치게 적고 전문성에서 처지는 것으로 보인다.”
 
 
연재 지면 따기- 단편의 힘을 딛고…
이유정의 일본 진출 과정에 주목하는 것은 그 이전에 일본에 나간 작가가 없어서가 아니다. 지금도 양경일 씨가 쇼가쿠간의 <선데이GX>에 ‘신암행어사’를 연재하고 있고, 권가야, 임광묵, 양재현 같은 젊은 작가들이 일본 무대에 올랐었다. 이 훨씬 전에는 오세호 씨가 <모닝>에 연재를 했고, 이현세, 황미나 씨도 일본에 진출했다. 하지만 이들 중 양경일 씨를 제외하고는, ‘한국 유명 작가의 일본 소개’ 프리미엄을 등에 업은 성격이 짙다. 이유정이 일본으로 눈을 돌린 것은 “어떤 면에서 국내보다 일본 잡지에 연재하는 게 더 쉬울 수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마땅히 연재할 지면도 없지 않느냐는 반문이다. 
같은 조건에 처한 우리 작가들이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는 가운데 그가 거쳐 온 과정이 실전을 위한 참고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면밀한 분석이 요구되는 것이다. 속단하긴 이르지만 올해 안에 이유정과 같은 형태로 일본 잡지에 데뷔하는 우리 작가가 여럿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일본의 한 출판사가 <코믹 블레이드>라는 청소년 잡지 창간을 구실로 공모전을 열면서 국내 작가들을 적극 끌어 들였다. 이 결과 10여 명이 당선되고, 그 중 두 명은 지난해 12월 나온 창간 준비호에 단편을 싣는 성과를 이뤄낸 사례가 있다. 이들 작가들의 1차 목표 또한 연재 지면 따기로 이유정과 같은 처지이다.  먼저 일본 무대에 서게 되면 국내에서의 이력은 하나도 내세울 수 없고 신인으로 대접받게 된다. 이유정은 여기에 대해서는 분명히 정리된 생각을 밝혔다. 
“일본에서 신인으로 대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 새로운 체제로 진입하는 것이니 내가 감당해 맞춰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건 일본에서 나를 검증하기 위한 과정이고, 원고료 같은 조건에 따른 기준일 뿐이다. 한국에서 10년간 창작을 해온 내가 신인일 수는 없다. 새로운 것을 보여 줄 태세로 일본에 진출하는 것이고, 그럴 자신이 있다.”
이유정의 이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이유정은 편집부와 직접 부딪히면서 그림과 이야기, 두 가지 측면에서 자신을 얻을 수 있었다.
“만화는 어딜 가도 그림부터 먼저 평가한다. 편집부는 데생, 연출은 기본이고 독특한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느냐는 것을 본다. 특히 한국 작가들은 일본 작품을 베낀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어 그림이 튈 필요도 있다. 다행히 그림은 처음부터 좋은 평을 받았다.” 다음은 이야기. 그런데 이 점에서라면 그는 ‘즉시 전력’으로 사용할 확실한 ‘필살기’를 갖추고 있는 셈이다. 다름 아닌 짜임새 있는 단편을 만들 수 있는 힘이다. 단편은 연재와 달라 참 고민스러운 구상이다. 하지만 그는 단편을 즐겨오며 꾸준히 발표해 왔다. 다시 이현석 씨의 말이다.
데뷔 10년 또래 작가치고 이유정만큼 단편을 자주 그려내던 이가 있었던가. 연재 중에도 단편에 대한 긴장을 놓지 않았던 것이 그를 일본 무대에서 버티게 해주는 힘의 원천이 되고 있다. 고단샤 공모전 치바 테츠야상 수상작인 <말 없는 아이들에 대한 보고서>.“일본 잡지의 편집장들은 작가에 대한 평가를 단편 3편 이상을 게재한 뒤 그 반응을 보고 나서 내린다. 단편을 통해서 작가 역량을 시험한다는 말은 틀림없다. 왜냐하면 신인은 단편을 통하지 않고 독자를 만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에 머물면서 쇼가쿠간에 ‘신암행어사’를 연재하는 윤인완 씨도 이점을 분명히 확인해 줬다. “일본에서 단편을 거치지 않고 연재 지면을 따는 것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로 봐야 한다. ‘신암행어사’를 연재하기 전에 단편을 두 편 먼저 실었고, ‘신암행어사’도 처음에 단편부터 시작해 연재로 이어진 것이다.”
변병준 씨는 이런 점에서 이유정이 강점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일본 편집부는 1회, 3회 정도 분량의 단편을 차례로 요구한다. 이 단편이 발판이 돼 연재로 이어진다. 이유정은 확실히 단편에 강한 면이 있다. 또 장편도 잘 하는 작가라 일본에서 활약이 기대된다.”
결국 기자는 이유정의 일본 진출 과정을 좇으며 세 가지 결론을 내렸다. 일본 진출을 위해 제일 필요한 것은 첫째는 작가적 역량이다. 다만 그것을 판단하는 첫 시험이 단편 만들기란 점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일본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꿰뚫어야 하는 점은 당연하달 수 있다. 이유정은 이 점에 대해서는 직접 부딪히면서 확인했는데, 과감하게 도전해 실전에서 작가 스스로 체득하는 것을 두 번째 필요한 과정으로 추천한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 이현석 씨는 사견임을 전제로 “적지 않은 작가들이 직접 일본 편집부를 찾았지만 성공한 경우는 몇 안 된다며 절대 신중해야 할 일”이라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신뢰할 수 있고, 전문성을 갖춘 현지 파트너의 지속적인 지원도 필수조건에서 빠뜨릴 수 없다.
이유정의 일본 만화잡지 연재지면 따기. 그의 작가적 역량이면 일본 최대 메이저 잡지의 지면을 정공법으로 공략해 입성하는 모범적인 선례를 남길 것으로 기대한다.
 
 
 
2005-10-11 17: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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