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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프레, 판타지의 현실화

판타지를 입고 캐릭터를 연기하라


글│김채린 (서울대 미학과 석사과정 miaow@naver.com)


엥겔계수가 낮아지면서 으레 취미의 영역은 한층 넓어지고 더욱 깊어지기 마련이다. 이런 변화는 취미의 영역을 단순 오락거리라라는 인식을 깨고 전문적이고 독특한 영역에까지 확대 발전시키기에 이르렀다. 취미에 대하여 무슨무슨 감상 정도로만 일관하던 사람들은 이제 직업 이외의 다른 분야에 심층적으로 접근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오타쿠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일종의 마니아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마니아 문화라는 것이 이제는 죽은 담론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여전히 ‘폐인’과 같은 단어로 치환되어 새로운 문화로 변형, 발전되어 우회로를 타고 있다. 이러한 것을 문화적 세기라고 명명한다면 이는 단지 그 이전의 시대가 ‘문화적’이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취미’를 소유하는 계층이 확대되었고 그에 따라 문화라는 의미에 고급문화만이 아니라 하위문화까지 포섭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고급문화만이 ‘문화’와 ‘취미’에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는 인식이 만연하던 시절이 있었다. 반면, 이제는 그저 소비적, 소모적으로만 여겨지던 킬링타임용의 대중문화가 마니아 문화에 의해 그것의 깊이와 넓이를 다시 측량 받게 되었다. 만화는 그 어떤 장르보다 이러한 문화적 기류의 급물살을 타고 재평가된 분야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새로운 만화 감상법의 시작

여유로운 시간이 생기면 만화를 읽는다는 취미의 방식은 그러므로 매우 소극적인 방식이 될 수 있다. 새로운 의미와 문화를 창출하지 못하는 취미는 너무나도 단순해서 취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매우 지루한 답변방식이 될 수 있다. 만화를 읽는다, 라는 말에 수미쌍괄식으로 적극적 감상법을 이야기 한다면 동인지를 만든다거나 코스프레를 하는 것 정도가 될 것이다. 동인지를 만든다는 것은 어떤 비하인드 스토리 혹은 새로운 방식의 전개를 상상한다거나 만화가와 같은 방식으로 만화를 자신만의 상상영역에 포함시킨다는 점에서 같은 차원의 발현과 표현, 그리고 그 세계의 소유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코스프레는 지면으로서의 표현이 아니라 나의 세계에 만화를 편입시키는, 새로운 차원으로 발현과 상상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이러한 코스프레가 하나의 문화 행사가 되기 시작한 것은 약 십여 년이 지났다. 처음 그 시작은 1989년 전국 아마추어 만화 동아리 연합이 시작되면서 벌였던 코믹마켓에서 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는 증언들이 상당히 설득력을 얻고 있다. 처음에는 코스프레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화 캐릭터들로 분한 코스플레이어들이 나타나면서 코스프레를 알렸다. 이후 1998년부터는 정식으로 그 코믹마켓의 일환 행사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코스프레는 일반인들 사이에서 생소한 단어였고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도 매우 소수였다. 이러한 코스프레 놀이 문화가 상당히 알려지게 된 것은 pc 통신과 인터넷 망을 통해서였다. 97년 하이텔에서 코스튬 플레이 동호회가 생기면서 이어 천리안과 유니텔, 나우누리 등 4대 통신 모두에서 모두 관련 동호회를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통신 문화가 서서히 사라지고 난 후에도 인터넷의 포털 사이트들에서는 코스프레와 관련된 커뮤니티와 홈페이지를 쉽게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증가 추세는 현재까지 이어져 사천여개가 넘는 커뮤니티들이 개설되어 있고 다음과 싸이월드의 동호회 중 유효 활동을 하는 곳이 이천여 개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각종 공식 행사나 코스프레 대회 같은 것들도 수십 개에 이른다. 대표적으로 만화용품 전문 업체인 코믹월드에서 주최하는 행사는 2005년 2월까지 서울에서는 44회, 부산에서는 26회가 이루어졌을 정도이고 동대문의 쇼핑몰이나 그와 비슷한 기업들의 마케팅 수단으로 코스프레 행사를 주관하는 경우들도 늘고 있는 실정이다.

모방과 창조의 극적인 결합

처음 코스프레가 시작된 무렵은 물론이고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코스프레는 왜색문화의 무분별한 수용쯤으로 이해되었다. 만화의 캐릭터를 대상으로 하는 코스프레가 일본에서 시작되기도 하였고 코스프레의 대상이 일본 만화가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게 여겨졌다. 그랬기 때문이었는지 코스프레를 알리면서 그것의 기원이 일본이 아닌 영국의 예식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서두로 삼는 경우들이 많다. 죽은 영웅들을 추모하면서 그들의 모습대로 분장하는 풍습이 미국의 코스튜밍(costuming)으로 이어졌고 그것이 다시 일본으로 유입되면서 코스프레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코스프레의 원형을 굳이 영국에서 찾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이미 르네상스 이전의 유럽에서도 전쟁을 재현하며 군인으로 분장하는 행사들이 있어 왔고 가톨릭의 성일에는 성인들의 모습으로 분하는 행사 등이 있었다. 원시 시대에서도 누군가를 칭하며 제의를 행했던 일들을 어렵지 않게 살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코스프레를 어떤 특정한 문화인류학적 발생으로 소급해 들어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수 있다. 우리가 말하는 코스프레는 전적으로 만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그 안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그것을 기본으로 확장되어 나간다는 협의만을 규정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부분은 서구의 코스튜밍과 우리나라나 일본의 코스프레를 어떻게 구별하느냐 하는 점이다. 특히 미국의 코스튜밍은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 원더우먼과 같은 히어로나 영화 속 캐릭터의 복장을 하는 경우가 많고 이것은 그저 파티를 즐기기 위한 일종의 가면무도회이다. 그러므로 서구의 코스튜밍은 특별한 파티를 위해 의상을 준비하는 것이지 누군가로 분하는 것이 중심이 되지는 못한다. 반면 코스프레는 파티가 중심이 아니라 직접 자신이 선택한 인물로 변화하는데 중심이 있다. 코스프레를 함으로써 캐릭터에 완전히 흡수되고 그에 따라 캐릭터가 지닌 힘을 그대로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코스프레와 우리나라의 코스프레는 어떻게 다를까? 미국과 비교해 파티 문화의 부재와 같이 별반 다르지 않은 일본과 우리나라의 코스프레 양태는 상당히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코스프레는 일본의 코스프레보다 상당히 공적인 영역으로 나와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코스프레는 우리나라보다 약 15~6년 정도 앞서 정착한 문화이나 오타쿠적 특성으로 매우 소규모로 이루어지고 있는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다가 최근에 들어 우리나라의 큰 코스프레 행사를 본떠 각종 행사의 부대행사로 활용되고 있다고 전해진다. 이런 차이 때문에 우리나라의 코스프레는 일본의 코스프레보다 퍼포먼스적인 성격을 더 많이 띄고 있다. 우리나라의 코스프레가 더 ‘보여주기’에 능란한 것은 기본적인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의 시뮬라르크

코스프레의 또 하나 가장 큰 특성은 코스플레이어가 직접 의상을 현실에 실현시키는 것에 있다. 완벽한 재현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상상력 따위는 필요하지 않을 성 싶지만 입체일 수가 없는 종이 위의 그림 몇 장을 보고 옷을 만드는 것은 이미 만들어진 옷을 보고 그것을 그대로 재단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을 그림으로 그려내고 그것을 쉽게 구현해 낼 수 있다고 한다면 아마 만화가와 패션 디자이너의 영역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의복을 구성하고 패턴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코스플레이어들의 능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베르사유의 장미>에 등장하는 마리 앙뜨와네뜨의 의상과 같은 것들을 코스프레 한다는 것은 18세기 프랑스 왕조 복식을 고증하여 그리거나, 놀라운 창의력으로 아름다운 드레스를 디자인하는 것보다 더 큰 어려움이 있다. 그러므로 코스프레에는 또 다른 영역의 창의력이 필요하다. 그림으로만 본 러프를 달고 페티코트를 만드는 것은 생각처럼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봉신연의>의 달기와 같은 의상은 몸에 피트 되는 얇은 직물의 봉제에 익숙하지 않은 아마추어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들이다. 이런 전문가와 같은 연구와 재능으로 많은 코스플레이어들은 2D의 만화라는 시뮬라르크를 현실로 이끌어 낸다. 시뮬라르크가 현실을 대체하고 그것을 통해 세계를 인식한다는 보드리아르의 시뮬라시옹의 세계는 현실과 만화의 피드백 가운데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코스프레가 시뮬라르크의 구현이라는 것만으로 의미가 다하지는 않는다. 코스프레는 일종의 연극적 빙의가 되는 순간을 제공하여 다중적 인격을 소유, 혹은 억눌린 욕망들을 발현하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특징은 서구의 코스튜밍과 비교해 볼 때 더욱 명확해진다. 서구의 코스튜밍은 그 대상이 되는 인물의 복장을 입는 것이지 그 인물로 자신을 직접 대입하여 자신이 그 대상이 되는 것을 전제로 삼지는 않는다. 그러나 코스프레는 코스프레를 하고자 하는 인물과 자신을 완벽하게 동일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만약 스타워즈의 레아 공주를 코스튜밍 했다면 이것은 동일화라기보다는 패러디에 가깝다. 그러므로 레아 공주와 얼마나 똑같은지의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그저 레아 공주임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코스프레의 경우는 완벽하게 그 인물을 재현해 냈느냐가 그것의 가장 중요한 관건이다. 누군가가 [데스 노트]의 L군을 코스프레 했다고 한다면 의상뿐만 아니라 포즈나 표정이 얼마나 흡사한지 살필 것이다. 또한 캐릭터를 잘 이해하고 있는 코스플레이어는 그가 분한 L군의 성격을 발현하는 것에 자신의 원래 성향과 관계없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 코스프레는 변신이 아니라 완벽하게 그 인물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캐릭터를 완벽하게 재현해 냄으로써 느낄 수 있는 감상은 심리적 동질감이나 인물에의 동화와는 다른, 한 차원 더 높은 단계의 일치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심리학에서 이야기 하는 역할 모델(role-model)과는 또 다른 맥락에서 이해된다. 코스프레를 행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자아의 영역에 포섭시키기보다는 이미 내재해 있었으나 미처 발현하지 못한- 프로이트라면 초자아super ego 때문이라고 말하겠지만- 욕망과 욕구들이 코스프레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코스플레이어가 그 인물이 된 듯이 행동할 수 있는 것은 만화 속에서 꺼내온 의상만으로 가능해진다. 새로운 자아를 창출한 코스플레이어는 이상적 자아와 실제적 자아가 설사 불일치된다고 하더라도 이미 심리적으로 그 대상과 일치감을 느끼고 있으므로 평소 성격과는 관계없이 코스프레를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코스프레가 연극에 가까운 것부터 단순한 퍼포먼스,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는 것, 가볍게 의상만을 만들고 입는 것 등, 적극적 참여자에서부터 소극적 참여자에까지 그 스펙트럼은 무척 넓다. 그러나 연극적 빙의에서 비롯되는 성격, 성향, 태도의 일치감과 그것으로 인한 자아의 변화는 모두 의상을 입어보는 그 순간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심리학자들이 성향과 성격, 가치관 등이 의복행동에 영향을 끼친다고 하였지만 이것의 역반응 역시 가능하다. 고프만과 같은 심리학자들은 무엇을 하려고 노력하기보다 무엇이 되어 보이려고 노력하는 연극적 인간을 상정한다. 그가 말하는 인상관리(impression management) 이론은 이것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의상을 입음으로 해서 어떠한 성향이 발현되는 코스프레의 행태를 적절하게 설명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코스프레의 의의는 위와 같이 자아의 도플갱어식 발현, 판타지 세계의 현실화, 즉 2D의 시뮬라르크를 3D의 현실로 다시 옮겨 놓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이 위의 그림을 현실로 이끌어내는 상상력과 창의력은 단순한 취미가 얼마나 적극적인 창조력으로 전환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놀라운 발견이다. 이 놀라운 발견으로서의 코스프레가 앞으로 어떤 분야를 적극 끌어들여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 지켜보는 것도 매우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엽기 문화가 결합된 털복숭이 아저씨의 세일러문 코스프레와 같은 것뿐만 아니라, 만화의 영역은 넘어 섰으나 만화적 상상력과 유머를 고스란히 지니고 더 넓은 소재를 찾아 활용하는 것 등을 간간히 목격할 수 있다. 코스프레의 가능성이 얼마나 무궁무진한지 또한 얼마나 다양한 문화와 취미의 영역을 흡수할지 앞으로도 계속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2005-10-13 11: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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