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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애니의 섹슈얼리티 : 소녀와 마녀

그녀, 오늘도 성장(成長)한다
성(性)적 객체에서 성(聖)스런 주체로

 

글│박규태 (한양대학교 일본언어문화학과 교수 chat0113@paran.com)

 

일본문화의 중요한 특질 가운데 하나로서, 사물을 정형화시켜 하나의 틀 안에 수렴시키려는 경향을 들 수 있다. 일군의 복합적인 현상을 특정한 장르나 범주로 유형화하여 분류하기 좋아하는 일본인의 습성도 그런 경향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오늘날 일본에는 이른바 ‘소녀문화’라는 범주가 통용되고 있다. 실제로 일본만화나 애니메이션(이하 애니) 및 영화라든가 음악에는 소녀 캐릭터들이 넘쳐흐른다. 뿐만 아니라 갈수록 소녀문화가 현대 일본사회 전반에 걸쳐 널리 침투하고 있다.

“소녀는 누구인가?” 미야자키 애니를 볼 때마다 이런 의문이 떠오른다. 막연한 노스탤지어, 성적으로 미숙하면서도 청초한 에로티시즘, 귀여운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취향, 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니며, 남자도 아니고 여자(성숙한 여인)도 아닌 어떤 중간적인 존재양식. 요컨대 소녀는 틈새의 존재라 할 수 있다. 그 틈새는 매우 미세하고 애매하고 불투명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신비롭기까지 하다. 소녀문화가 일본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는 어쩌면 소녀가 내포하는 이와 같은 틈새의 공간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틈새는 특히 조밀한 틀의 네트워크 문화 속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일본 남성들에게 자유의 공간으로 다가서는 듯싶다. 게다가 일본인의 심성을 색깔에 빗댄다면 유화적 원색과 원색 사이의 틈새에 존재하는 파스텔화적 색채에 가깝다고 느껴지는데, 그런 일본인들의 틈새에 대한 감수성은 분명 남다른 구석이 있을 법 하다.
미야자키 애니에도 이런 소녀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한다. 가령 <미래소년 코난>(1978)의 라나, <루팡3세 카리오스트로의 성>(1979)의 클라리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의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1986)의 시타, <이웃의 토토로>(1988)의 사츠키와 메이, <마녀 택급편>(1989)의 키키, <모노노케히메(원령공주)>(1997)의 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2)의 치히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의 소피 등, 대부분의 미야자키 애니에는 다양한 유형의 소녀들이 주인공으로 나오거나 혹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물론 방금 언급했듯이, 일본 애니에서 소녀 캐릭터들이 주인공으로 설정되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특징이다. 저 유명한 <미소녀 전사 세일러문> 시리즈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미야자키 애니에 소녀들이 많이 등장한다는 사실만 가지고는 특별히 유별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미야자키 애니에 등장하는 소녀 캐릭터들이 가지는 독특한 향기와 빛깔에 있다. 잠시 이 점에 대해 살펴보자.

로리콘의 우상(?), 미야자키

우선 <미소녀 전사 세일러문>의 소녀들은 친구라든가 일상생활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데 비해, 미야자키 애니의 소녀들은 종종 정의라든가 세계를 지킨다든지 혹은 인류를 구한다는 거창한 목적을 위해 싸운다. 예컨대 나우시카는 인류의 구제자로 묘사되고 산은 숲을 파괴하는 인간들과 맞서 싸우는 여전사로 그려지고 있다. 흔히 소녀시대라고 하면 아기자기하고 일상적인 것에 세심한 주의와 애정을 기울이는 시기이지만, 미야자키 감독은 이런 소녀들에게 철학적, 종교적, 이데올로기적인 사명을 부여한 것이다. 이런 연유로 미야자키 애니에는 여성적이고 모성애적인 부드러운 감각과 남성적인 강인함 그리고 자주성을 겸비한 이상적인 소녀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소녀 아이덴티티는 실은 일본사회에서 매우 이질적인 특이점으로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야자키 애니의 소녀 캐릭터들이 일본인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모았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런 물음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얻기 위해 우리는 현대일본사회의 변화하는 단면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사회에는 ‘오타쿠’라는 유행어가 나돌았고, 그에 따라 이른바 ‘오타쿠 애니’라는 장르도 생겨났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오타쿠적 애니의 목록 중에 미야자키 애니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미야자키 애니의 속을 깊이 파헤쳐 보면 오타쿠적 요소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 가령 한 때 로리콘(로리타 콤플렉스를 줄인 조어. 어린 소녀에게 열중하는 오타쿠를 가리키는 말)의 대명사였던 <루팡 3세 카리오스트로의 성>의 여주인공 클라리스는 풍만한 가슴과 성숙한 육체에 순수하고 순진한 백치미의 영혼을 가진 소녀상으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특히 일본 남성들의 이상적인 소녀상이라 할 수 있다. 아마 이런 이상적인 소녀상에 끌리지 않는 남자는 없겠지만, 일본 남자들의 소녀 취향에는 분명 유별난 구석이 있다. 좀 특수한 사례이긴 하지만 일본의 AV(성인용 비디오)나 포르노 애니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르가 이른바 미소녀계라는 사실도 이 점을 잘 보여 준다.
영원의 소녀상이랄까. 클라리스가 극대화되면 나우시카에 이르게 된다.그렇다면 일본 남성들의 이와 같은 유별난 소녀 취향에 숨겨진 사회적 의미는 무엇일까? 이 물음을 규명하기에 앞서 먼저 미야자키 애니와 오타쿠 애니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자. 엄밀히 말해 ‘미소녀계’라는 용어가 일본사회에 등장한 것은 90년대 이후의 일이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미소녀라 하면 ‘로리타’(어린 소녀)를 의미했었다. 그러다가 90년대 이후에는 ‘미소녀계’라는 용어가 로리타를 포함하는 더 큰 범주로 쓰이게 되었다. 이런 변화의 배후에는 한 엽기적 사건이 있었다. 1989년 여름에 일어난 유아연쇄 살인사건이 그것이다. 미야자키 츠토무(宮崎勤)라는 용의자가 체포되었을 때 그의 방에서 엄청난 분량의 오타쿠적 비디오가 발견되었는데, 사람들은 그 중에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이 다수 끼어있었다는 사실에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용의자는 다른 비디오와는 달리 미야자키 작품에만 특별히 ‘미야자키 감독님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미야자키 감독님의 이웃의 토토로’ 식으로 일일이 라벨을 붙여 놓았다고 한다. 단순히 자기와 성이 같다고 해서 그런 건 아닐 것이 이 엽기적인 용의자는 실제로 미야자키 애니의 영향을 받았을 성싶다. 사실 미야자키 감독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이전까지만 해도 로리콘 오타쿠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천공의 성 라퓨타> 이후 미야자키 하야오는 오타쿠들보다는 일반인들 사이에서 ‘애니 작가’로 굳건히 자리를 잡게 된다.

로리타에서 미소녀로

어쨌거나 이 사건 이후 일본사회에서는 로리콘이라는 용어가 터부시되었다. 그 대신 등장한 용어가 바로 ‘미소녀계’라는 용어였던 셈이다. 1989년에서 1990년에 걸쳐 미소녀계 코믹만화 잡지의 창간이 줄을 이었는데, 거기서도 로리타라는 용어는 일체 쓰이지 않게 되었다. 로리타에서 미소녀로의 이와 같은 변화는 매우 상징적이다. 이제 우리는 일본 남성들의 소녀 취향이 어떤 사회문화적 의미를 내포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차례이다. 가령 나우시카라는 캐릭터는 소녀 이미지에 있어 전술한 클라리스를 극대화시킨 측면이 있다. 나우시카의 소녀 이미지에서 남자들은 정신과 육체의 미묘한 언밸런스를 느끼고 그런 괴리 안에서 신비로운 에로티시즘을 추구할지도 모른다. 영원의 소녀상이라고나 할까. 물론 남자들이 그런 이상적인 소녀상에서 강렬한 에로티시즘이나 수동적인 성적 존재를 느낀다는 것 자체에 대해 시비를 걸 생각은 없다. 여기서의 관심은 소녀라는 애니 코드를 통해 일본 사회문화의 한 단면을 읽고자 하는 데에 있으니까. 일본의 여성학 연구자 무라세 히로미(村瀨ひろみ)에 의하면, 이상적인 소녀상은 근대 일본의 이데올로기가 강요한 것이며 그것이 미야자키 애니의 여주인공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 소녀 주인공들은 성의 어두운 그림자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하고 자신의 성적 매력에 대해서도 아무런 자각이 없다. 로리콘들은 바로 이런 순진무구한 소녀들을 상상 속에서 자기 마음대로 가지고 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또한 유명한 <기동전사 건담>의 감독 도미노 요시유키(富野由悠季)도 미야자키 하야오 같은 천재적인 작가가 아무런 자각 없이 소녀 주인공들을 양산해 왔다고 비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미야자키 감독이 소녀 주인공의 창조에 있어 전혀 자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보인다. 무엇보다 80년대 중반부터 미야자키 애니의 소녀 주인공들이 오타쿠 업계로부터 급격히 퇴조했다는 사실이 이 점을 입증한다. 그런데 이 시기는 미야자키 감독이 이상적 소녀상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에 의문을 품고 새로운 유형의 소녀상을 모색하기 시작한 시점과 일치한다. 실제로 <천공의 성 라퓨타>의 시타 이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소피에 이르기까지 미야자키 애니의 소녀 캐릭터들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성장하는 소녀상으로 바뀌어 왔다. 즉 미야자키 애니의 소녀들은 이제 더 이상 클라리스나 나우시카 같은 ‘영원의 소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가령 사츠키와 메이는 숲의 정령 토토로와의 만남을 계기로 엄마와 떨어져 자라온 아이의 외로움을 극복해 나갔으며, 키키는 도시 여성의 강인한 자립성과 생명력을 보여 주었고, 산은 아시타카와의 사랑을 통해 공격적인 증오심을 극복할 만한 가능성에 대해 마음의 문을 연다. 또한 치히로는 기이한 온천여관에서의 노동을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는가 하면, 소피는 마법에 의해 할머니로 변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울에 대한 사랑으로써 소녀기의 권태와 무기력을 극복해 나간다.
그럼으로써 이제 나우시카에서 정점을 보였던, 정신과 육체의 언밸런스가 특징인 이상적 소녀상이 성장하는 소녀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근래에 개봉된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는 미야자키 애니 최초의 가벼운 키스신과 누드신이 등장하지만, 이 작품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에서 미야자키 감독은 소녀 주인공의 누드를 묘사하는 데에 강한 저항감을 가진 채 오로지 소녀의 정신적 측면에 의식적으로 집중했다는 점도 소녀 주인공의 창출에 있어 그가 지녔던 자각적 측면을 보여 준다.

소녀, 세상을 아우르다

이쯤 해서 미야자키 애니의 소녀 캐릭터에서 읽어낼 수 있는 일본의 사회문화적 에토스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왜 하필이면 소녀인가, 미야자키 애니에 있어 이상적인 ‘영원의 소녀상’에서 진화하는 소녀상으로의 전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물음과 관계가 있다. 미야자키 애니를 잘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 소녀 주인공들에게 모친이 없거나 있더라도 존재감이 희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예컨대 나우시카의 모친은 회상 장면에서 단 한번만 등장할 뿐이며, 사츠키와 메이는 모친과 떨어져 생활한다. 키키 또한 양친 슬하를 벗어나 도시로 떠나고, 산은 아예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로 설정되어 나오며, 소피의 모친은 두 번째 남편을 위해 딸을 배반하는 무정한 엄마로 묘사된다. 이와 같은 모성과의 거리는 미야자키 감독 자신의 성장환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 그의 모친은 줄곧 병상에 누워 있었고, 마침내 1982년에 작고했다고 한다. 이런 경험이 미야자키 애니 속에서 모성의 부재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 우리는 미야자키 애니에 있어 모성의 부재가 실은 모성 추구의 한 형식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혹 미야자키는 소녀라는 우회로를 통해 모성을 추구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미야자키 애니의 소녀 취향은 일종의 대리모성 추구라는 해석이 가능할 거라는 말이다.
이처럼 미야자키 애니의 소녀 캐릭터와 모성을 연관시켜 볼 때, 우리는 그 소녀들이 보여주는 구원의 여성상(대표적으로 나우시카)이라든가 대지모신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강력한 친화성(대표적으로 산)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그 배후에서 모성사회 일본 혹은 여성원리가 지배적인 일본문화의 에토스를 엿볼 수도 있다. 일본문화는 <겐지 모노가타리>(原氏物語)로 표상되는 섬세하고 자연친화적인 여성성이 두드러지지만, 다른 한편으로 남성적인 ‘무(武)의 문화’가 예로부터 지배적인 측면도 있으므로 단순히 여성적인 문화라고 끊어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이에 비해 일본사회의 모성성에 대해서는 보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예컨대 가와이 하야오(河合?雄)라는 꽤 유명한 융(Jung)학파 심리학자가 있는데, 그가 쓴 <모성사회 일본의 병리>(1976)를 보면 일본사회는 일차적으로 모성원리의 지배를 받는 사회라고 한다. 이 때의 모성원리는 ‘포함하는’ 기능으로 특징 지워진다. 부성원리가 모든 것을 구별하고 절단하려 든다면, 모성원리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든 것을 품어 안으려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성원리에 기초한 사회에서는 어머니(=일본이라는 집단) 슬하의 장(場) 안에 있는 모든 자녀들(일본인)에게 절대적인 평등성을 부여한다. 이를 ‘장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면, 부성원리는 개인에게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개(個)의 원리’라 할 수 있다. 야스쿠니 신사참배 문제라든가 역사교과서 왜곡문제 등으로 여전히 시끄러운 오늘날의 동아시아 정세와 관련하여 종종 전쟁책임에 대한 일본국가의 무책임성이 지적되곤 하는데, 이는 일본인이 개인의 책임과 장(집단)의 책임을 혼동하는 데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여론조사의 통계결과는 많은 일본인들이 가해자라기보다는 오히려 피해자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게다가 이와 같은 장의 원리에서는 그 장에 속해 있느냐 아니냐가 윤리적 판단의 일차적 기준이 되기 십상이다. 거기서는 선악의 문제라든가 옳고 그름의 문제는 종종 이차적인 문제로 밀려난다.
이것은 미야자키 애니에 있어서 최초의 장면이다. 작가의 자각도 함께 한다. 이런 장의 원리 및 그 토대를 이루는 모성원리는 이른바 ‘아마에’(甘え)라는 특이한 심리구조에 입각한 일본적인 인간관계를 낳았다. 정신의학자 도이 다케오(土居健郞)는 <아마에의 구조>(1971)에서 이 아마에를 “남에게 의지하고 싶은 욕구”라고 정의내린다. 아마에는 특히 모친에 대한 자녀들의 의존적 심리가 너무 강한 나머지, 어른이 된 후에도 심리적으로 모친과의 분리가 곤란한 일본적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일본의 사회적 규범에는 이와 같은 의존적 인간관계가 내면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아마에의 심리는 다른 문화권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가령 우리나라의 ‘응석’이라든가 서양의 ‘마더보이’(mother-boy)라는 말도 어느 정도 아마에와 통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응석이나 마더보이의 문화현상이 주로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는 데에 비해, 아마에는 집단적 차원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앞서 언급한 가와이 하야오의 표현에 의하면, 개인보다는 집단적 가치가 우선시되고 아마에라든가 모성원리 혹은 장의 원리로 특징 지워지는 일본사회는 분명 ‘병리’를 앓고 있다.
알고 있었는가. 미야자키 애니 속에 숨겨진 오타쿠적 요소를.요컨대 미야자키 애니에 있어 모성의 대체물로 등장하는 소녀 캐릭터들은 특히 일본 남성들의 아마에 심리를 충족시켜 주는 측면이 있다고 보여진다. 이런 의미에서 미야자키 애니는 지극히 일본적인 문화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많은 평자들의 미야자키 비판은 어찌 보면 그의 작품이 지닌 보편적 지향성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런 보편성 추구의 이면에 여전히 드리워져 있는 일본적 특수성의 베일을 겨냥한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야자키 자신은 정작 일본사회의 병리를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감지하는 인물이었다. 유럽지향적 성향이 강했던 그는 원래 “일본은 안 돼.”, “일본은 싫어.”라는 태도를 견지해 왔던 지식인이다. 그런 그가 근현대 일본 혹은 아시아적 분위기를 애니에 반영시키기 시작한 것은 <이웃의 토토로>부터이지 않았나 싶다. 어쨌거나 소녀라는 존재양식은 불투명하고 애매하지만, 미야자키 감독은 끈적끈적한 점액질의 에로스 대신 투명하고 개성적인 소녀상을 창출하는 데에 성공함으로써 특수성으로부터 보편성으로의 일본문화 개조라는 비전을 제시해 왔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마녀

끝으로 미야자키 애니의 소녀 캐릭터와 관련하여 마녀에 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마녀의 택급편>을 본 자는 아마도 한번쯤은 의외의 신선한 느낌을 가졌을 법하다. 빗자루를 탄 추한 할멈의 이미지를 예상했다가 뜻밖에 귀엽고 순진한 소녀, 빗자루도 제대로 타지 못하는 키키가 마녀 캐릭터로 설정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자면, 마녀란 기독교라는 가부장제적 종교가 세력을 확장하기 이전의 이교적 세계에 있어 지도적인 여성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녀들은 대지모신을 숭배하는 모계적 사회의 무녀, 산파, 예언자 등 생명과 치유와 미래에의 전망과 관련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임신, 출산, 육아, 음식 만들기, 농사일, 약초 캐기 등의 일상생활을 담당하는 직능자였다. 그러던 것이 기독교의 이교탄압 과정에서 왜곡된 악마적인 이미지를 강요받게 된 것이다. 미야자키 감독은 이런 마녀의 본래적인 이미지를 그의 애니 속에서 되살리고자 했다. 실제로 그의 작품 속에는 마녀들에 대한 강렬한 동경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예컨대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나는 전언자 키키를 비롯하여 인류의 미래를 태양과 관련시켜 예언하는 라나, 바람을 탈 수 있고 나무나 벌레(오무)와도 말을 나누는 나우시카, 주술적 힘을 지닌 고대문자를 아는 시타, 숲의 정령 토토로를 불러내고 식물을 성장시키는 사츠키와 메이, 동물들과 교감하는 숲의 수호처녀 산 등은 모두 마녀적 이미지를 내장한 소녀 캐릭터라 할 수 있다. 나아가 몬스리(<미래소년 코난>), 쿠샤나(<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에보시(<모노노케히메>)와 같은 젊은 여성 캐릭터들도 자연을 지배하는 주술사로서의 마녀적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大)바바(<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도라(<천공의 성 라퓨타>), 이웃집 할머니(<이웃의 토토로>), 무녀 히이(<모노노케히메>), 할머니로 변한 소녀 소피와 아레치의 마녀 및 살리만(<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의 노파 캐릭터들 또한 마녀 혹은 마녀적 존재로 묘사되어 나온다. 이 등장인물들은 공통적으로 고대적 여성원리의 부활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다른 소녀 캐릭터들과 상통한다.
 
우리는 소녀와 마녀 사이에서 미야자키 애니를 보며 울고 또 웃는다. 선악의 피안인 그곳에는 숲이 있고 죽어가는 신이 있고 행방불명자가 있고 판타지가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소녀도 마녀도 섹슈얼리티의 표지어이다. 문예비평가 오스기 시게오(大杉重男)에 의하면, 일본적 공간에 있어 리얼리티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섹슈얼리티라고 한다. 좀 지나친 단정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섹슈얼리티에 대해 지극히 억압적인 기독교가 일본에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점이라든가 혹은 <겐지 모노가타리> 이래 일본문학이 ‘여자의 묘사’에 특권적 가치를 부여하고 강조해 왔다는 사실(최근에는 그렇지 않지만)을 염두에 두건대, 오스기의 진단이 전적으로 틀린 이야기만은 아닌 듯싶다. 이런 의미에서 미야자키 애니는 일면 보편적인 지평을 확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적인, 너무도 일본적인 현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2005-10-13 15:3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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