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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심의 어디까지 왔나

만화 심의의 현황과 과제


글|정준영 (동덕여대 교수, 간행물윤리위원회 제2심의위원회심의위원 junechung@hanmail.net)


사후심의가 이뤄지면서 민간단체에서 한국만화자율심의위원회라는 임의 단체를 만들어 심의필증을 교부했다. 민간 주도의 자율심의로서의 의미는 있으나, 실제 법적으로는 아무런 효력을 가지지 못한다.만화와 심의는 흔히 갈등관계에 있는 것으로 상정된다. 다양한 연령대의 수용자를 포괄하는 여타의 대중문화 장르들과 달리 어린이를 주 대상으로 삼는 만화는 심의의 기준이 어떻게 설정되는가에 따라 표현의 방법이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심의에 대해 만화계에 널리 퍼져 있는 부정적 인식은 이런 배경에서 설명될 수 있다. 특히 적대세력에 대한 사상검열의 방편으로 만화를 탄압했던 독재정권의 경험이 부정적 인식을 더욱 강화했다. 성인만화를 표방한 만화가 다수 쏟아져 나오고 있는 오늘날에도 그와 같은 불편한 심정은 별로 가시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심의에 대한 불만이 만화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문화의 표현물에 대한 검열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권력은 항상 전복적인 잠재력을 지닌 표현물을 억압하고자 노력해 왔으며, 이 과정에서 동원되었던 도덕성이나 미풍양속 등의 기준은 흔히 전복적 사고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하는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곤 했다. 이런 배경에서 표현의 자유가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로 확립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표현의 자유라는 원칙을 확립함으로써 권력의 자의적인 검열로 인해 전복적 사고가 억압되는 것을 막고 다양한 사상이 자유롭게 소통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와 도덕성 사이의 오랜 대립은 이윤을 추구하는 상업적 대중문화가 발전하면서 더욱 복잡한 형태를 취하게 된다. 억압에 대한 항거와 이윤 추구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심의는 이 딜레마를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출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심의가 출현한 배경으로는 크게 두 가지 요소를 꼽아 볼 수 있다.

심의의 필요성과 출현 배경

먼저 첫 번째로 현대사회에서 청소년의 위상에 대한 인식이 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성인 연령과 관련하여 논란이 벌어지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원래 청소년이란 생물학적인 연령으로 규정된다기보다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존재이다. 그런데 19세기를 거치며 확고한 사회적 범주로 정착된 청소년의 주된 특징은 미성숙성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성인이 지니고 있는 분별력을 지니지 못해 외부의 영향에 쉽게 휘둘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청소년은 상업적 대중매체의 이윤추구 논리에 휘말리지 않도록 적절히 지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대중매체에 대한 심의가 주로 연령별 등급제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청소년의 성숙 단계에 따라 그들이 수용하기에 적합한 내용을 제공해 주자는 것이다.
다음으로 청소년 보호의 논리는 매체의 영향력에 대한 논의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이를테면 폭력적인 내용에 자주 노출되면 폭력에 대해 둔감해진다는 논의가 그것이다. 물론 대중매체가 수용자들에게 어느 만큼의 영향을 미치는가는 항상 논란이 되었던 주제였다. 폭력적 영상물이 폭력적 경향을 발전시킨다는 논의에는 곧장 방법론의 맹점이나 인과관계 설정의 오류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반론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청소년을 위해 일정한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점에는 어느 정도의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청소년에 대한 보호가 실제로는 청소년의 배제를 위해 인위적으로 마련된 틀이라는 비판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일단 대중매체의 효과가 전혀 없다는 객관적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만약을 위해서라도 보호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공감을 얻은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만화에 대한 심의도 기본적으로 이런 공감에 기반하고 있다. 지금은 바뀌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심의기구인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가 청소년 보호법에 근거하고 있었다는 것이 이를 보여 준다. 하지만 최초 출발과정에서 독재권력의 억압기구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은 여전히 부담이 되고 있다. 이런 부담 때문에 2003년 이후 간행물윤리위원회의 근거가 출판 및 인쇄진흥법으로 바뀌었지만 민간의 자율심의가 아닌 타율규제의 형태라는 점에서 그런 변화만으로 기존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버렸다고 하기는 어렵다. 현재 한국만화가협회에서 일부 자율규제를 시도하고 있으나 자율심의를 거친 만화에 대해서도 재심의가 이루어지고 있어 실질적인 의미는 거의 없는 편이다. 출판사가 자율적으로 부착한 등급표시도 원칙적으로 임의적인 것으로 취급된다. 다만 과거와 달리 현행 심의는 사후심의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심의대상 도서도 납본 형태가 아니라 자체 입수가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점차 사회적 인식의 변화도 확산될 것이라 기대된다.

청소년 이용가, 불가, 음란물 세 등급으로 구분

현재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이루어지는 만화 심의절차는 크게 네 개의 단계로 구성된다. 먼저 문화관광부나 청소년보호위원회 등 관계기관에서 심의를 의뢰하거나 윤리위원회 사무처에서 직접 수집한 만화를 대상으로 사무처에서 일차적인 검토가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청소년이 이용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만화들을 걸러낸 후 문제의 소지가 있을 만한 만화를 외부 전문가와 상임 심의위원으로 구성된 전문심의위원회에 상정하는 것이다. 전문심의위원회에서는 이렇게 상정된 만화를 검토한 후 청소년 이용 가능 여부를 결정한다. 이 과정은 다시 2단계로 구분되는데 먼저 외부 전문가 중 1인과 상임 심의위원이 대상 만화에 대해 사전검토를 하며, 전체 회의에서는 이 검토를 바탕으로 위원들의 합의에 의해 대상 만화의 등급을 결정한다. 여기서 청소년 유해 간행물로 결정된 만화는 19세 이하 이용불가 표지를 부착하여 청소년에 대한 판매나 대여를 못 하도록 규제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위원회에서 음란 만화로 의심되는 만화는 따로 분류하여 소위원회에 회부하며 소위원회에서 최종적으로 해당 만화의 음란성을 판정한다. 소위원회의 최종 심의결과 음란 만화로 판정되면 고발이 이루어지며 해당 만화에 대한 수거와 판매금지, 출판사와 발행인에 대한 처벌 등의 법적 절차가 진행된다.
결국 심의과정을 통해 만화는 청소년 이용가와 불가, 음란물의 세 가지 범주로 등급구분된다. 청소년 이용가와 불가는 19세를 기준으로 19세 이하의 청소년들이 이용하기에 적합한 내용인가를 따지며 음란물은 우리 사회의 통념상 용인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만화에 적용된다. 이외 전체적으로 봐서 청소년 이용불가로 결정하기에는 애매하나 일부 표현에서 다소 문제가 있는 만화의 경우에는 의견제시라는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2003년의 사례를 보면 전체 심의 권수 8,767권(국내만화 5,083권, 외국만화 3,684권) 중 1,537권(국내만화 791권, 외국만화 746권, 심의 권수의 약 18%)이 청소년 이용불가 판정을 받았고 132권은 의견제시 판정을 받았다. 이용불가 판정의 이유로는 음란성이 60%, 포악성이 32%, 성폭력이 7%, 기타 1%를 차지했다.
만화 심의절차에 대한 이상의 설명에서 드러나듯이 현행 만화 심의는 흔히 오해되는 검열과는 큰 차이가 있다. 검열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대중매체의 표현 방식에 대해 통제를 가하는 것이라면 심의는 표현의 자유를 인정한 가운데 표현의 내용에 대한 등급 부여만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심의를 통해 음란물로 결정된 만화에 대해서는 법적 규제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여전히 논란의 소지가 존재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음란 여부를 판정하는 기준이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심의 역시 변형된 검열의 형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소년 보호의 당위성과 상업적 대중문화의 제한 없는 이윤추구욕을 인정한다면 심의 역시 일종의 필요악으로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편집자 스스로가 잡지 및 작품의 표지에 등급을 매기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심의를 의식한 자율적 조치일 따름이며, 사후심의를 통해 등급을 조정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잡지의 표지에는 ‘15세 이상만 보세요.’라는 표기가 보이며, ‘19세 미만 구독 불가’ 표시를 ‘15세’로 대신한 마크가 선명하게 보인다.

정부 주도의 심의기구는 민간 자율로 가는 과도기적 형태로 볼 수도

이처럼 만화에 대한 심의가 합의된 사회적 요구와 상당한 타당성을 갖춘 논리에 의해 뒷받침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현행 심의제가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다. 현행 심의제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쟁점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먼저 하나는 19세를 기준으로 청소년 이용가와 불가로 나누는 기준의 적합성 문제이다. 텔레비전과 영화 등의 영상물들이 12세와 15세 등의 세부 등급을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만화는 초등학생에서부터 고등학생 연령까지의 독자를 한 범주로 묶음으로써 심의기준의 설정이 다소 자의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심의의 과정에서도 고등학생 연령의 독자에게는 충분히 수용될 만하나 등급의 문제 때문에 청소년 이용불가로 분류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는 현실적으로 연령에 따른 이용규제가 쉽지 않은 현행 만화유통구조의 현실 때문에 기인하는 것이나 장기적으로 개선이 필요한 부분임은 분명하다.
두 번째로 심의의 효용성 문제도 있다. 인터넷의 광범위한 보급으로 누구라도 다양한 음란물을 쉽게 접촉할 수 있는 현실에서 만화에 대한 규제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게다가 만화에 비해 훨씬 실감나는 영상을 보여 주는 영화나 텔레비전에 비해서도 만화의 심의기준은 다소 엄격하게 책정되어 있어 과연 그런 식의 심의가 효과를 가질 수 있느냐에 대한 회의가 존재하기도 한다. 이는 만화에 대해 어린이용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학부모들이 사소한 표현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인데 역시 재검토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설치 근거가 변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심의가 여전히 규제에 치우치고 있다는 점도 지적될 수 있다. 청소년에게 적합하지 않은 만화를 걸러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좀 더 근본적인 해결책은 청소년에게 적합하면서도 좋은 만화가 많이 간행되어 시장의 논리에 의해 자연스럽게 악화를 구축하는 방식일 것이다. 현재 윤리위원회에서는 청소년 권장도서를 선정하고 좋은 책을 추천하는 등 출판 진흥을 위해 일정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만화와 관련해서는 별로 두드러진 움직임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특히 현재 우리 만화계가 극심한 위기에 빠져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윤리위원회가 긍정적인 방향에서 목적 달성을 위해 나서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성숙한 시민사회가 형성되어 시민사회 내부에서 자율적인 규제가 충분히 이루어진다면 만화의 심의는 불필요한 일이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종의 정부기관으로서 심의기구는 과도기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시민사회를 성숙시킴으로써 타율적 심의기구가 불필요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닐까? 무제한적 이윤추구 논리에 저항하는 만화 독자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을 기대해 본다.

2005-10-19 16: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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