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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기사
만화는 만만한 그림이 아니다
글  | 주재국

지난 11월 2일, ‘만화의 날’ 행사 중 하나로 토론회가 열렸다. 이름하여 ‘예술로서의 만화, 산업으로서의 만화’였다. 문화와 산업 측면의 발제와 패널 토론이 이어지다가 황미나 작가는 준비된 원고와 달리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분노한다. 아니 지금까지도 만화가 예술이냐 아니냐를 논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
흔히 만화를 제 9의 예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름을 지어서 부른다고 그 위치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는 여전히 만화를 만만하게 보는 시각들이 있는데 올 해 벌어진 몇 가지 일들을 다시 보자.
 
대통령 탄핵의 헌법재판소 판결에서 ‘재판이 망가가 됐다’며 흥분한 소추 위원측 변호사로 인해 ‘망가’는 ‘웃기고 있네’의 동의어가 됐다. ‘만화’가 아니라 ‘망가’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니 그나마 애국자라고 불러줘야 하는 건지 잠시 혼동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는 만만하고 웃기는 것이 만화라는 것이다.
드라마 <두근두근 체인지>는 이희정 작가의 만화 <내게 너무 사랑스러운 뚱땡이>를 베낀 혐의로 재판을 받아 2심까지 갔는데 이 작가의 고소가 기각됐다. 아주 쉽게 정리한 기각 이유는 “드라마가 만화를 베꼈지만, 구체적인 전개, 등장인물의 상호 관계 구도가 좀 더 복잡하게 변한 드라마로 인정된다. 그리고 이미 드라마도 끝났는데 뭔 고소냐?”로 요약된다. 만화를 실제 사람이 등장하는 드라마로 고치려면 반드시 고쳐야 하고 그것을 흔히 ‘각색’이라고 한다. 애니메이션 <테니스 왕자>에서 서브 하나가 핵폭발 같은 난리법석을 부리는데 이것을 실제 영상에서 재현하기란 비용도 많이 들고 기술적으로도 손이 많이 간다. 그러니 테니스 코트가 흔들리는 정도의 카메라 연출로 바뀌기도 한다. 또한 등장인물도 추가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조연이나 엑스트라 비용이 만화보다 드라마나 영화에 더 큰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이처럼 밑바탕에 깔린 에피소드와 구체적 이야기들이 베낀 것임에도 당연히 발생하는 각색의 변화로 표절이 가려지는 것이다. 더 황당한 것은 ‘드라마가 끝났다고 기각했다’는 내용이다. 유괴범이 유괴한 아이를 살해하면 이미 죽었으니 없던 것으로 하던가?
만화 <슈퍼 삼국지>가 <전략 삼국지>를 베꼈다는 혐의로 역시 재판을 받아 대법원 판결까지 나왔다. 그 최종 판결의 핵심을 쉽게 설명하자면 “스토리나 만화연출 방식에서는 베낀 거 같은데 등장인물의 얼굴이 다르다. 그러니 이것은 새롭게 만들어진 2차적 만화이다. 2차적 만화는 별개의 작품이므로 출판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표절로 시작된 싸움에 어느 새 2차적 저작물의 출판권 침해라는 옆길로 빠져버린 사례이다. 만화는 스토리와 그림이 작가의 연출에 의해 그려진다. 만화의 스토리와 그림은 어느 하나가 중심이고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둘의 완전한 결합으로 새로운 형식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스토리든 얼굴이든 어느 한 쪽의 표절 의혹이 있다면 그것은 표절이라고 봐야 한다. 아무리 만화계 내부의 일이라고 해도 옳고 그름을 외면할 수는 없다.
 
위 상황을 잠시 바꿔서 상상해 보자. 변호사가 “재판이 문학이 됐다”라고 했다면 어떤 의미일까? “만화가 완결됐으니 소설을 표절했다는 소리는 그만해라”라는 판결이 나왔을까? 또는 “영화보다 더 크고 복잡한 장면들이 그려지고 더 많은 등장인물이 나온 만화이니 이것은 별개의 작품이다”라고 말해줬을까? 마지막 상황이 음악이었다면 “악보는 비슷하지만 가사가 다르니 이것은 별개의 작품이다”라고 판단됐을까? 이 같은 상황은 상상에서나 가능하다. 그리고 상상은 아직 현실이 아니다.
현실에서는 다만 비슷한 내용을 만화 이외의 분야에서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드라마가 드라마를 베낀 상황인데, <사랑이 뭐길래>를 <여우와 솜사탕>이 베꼈다고 재판이 열렸었다. 그 판결을 쉽게 정리하면 “<여우와 솜사탕>이 <사랑이 뭐길래>를 베꼈고 구체적인 전개, 등장인물의 상호 관계 구도가 좀 더 복잡하게 변한 드라마로 인정된다. 그렇지만 9억원을 물어 줘라”가 된다. 이 문장을 위에 쓴 <내게 너무 사랑스러운 뚱땡이> 판결과 비교해 보라. 실제 판결문에서는 좀 더 자세한 이유가 나열되어 있겠지만 내용의 핵심은 같다. 그러니까 같은 이유로 다른 결과가 나온 셈이다. 만화를 베껴서 복잡하고 구체적으로 만들면 무죄, 드라마를 베껴서 복잡하고 구체적으로 만들면 유죄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최근 몇 년 간 만화의 소재를 영화나 드라마로 만드는 일들이 많아졌다. 그 대부분의 경우 만화의 원작을 정당하게 이용한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다루어지지 못하고 소문조차 없이 이용하는 경우도 여전히 존재한다. 어느 이용이든 상상의 이야기와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가장 적합한 형식이 만화 장점임을 보여주는 당연한 현상이다. 문제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면 제대로 된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과정이 무시되는 이유 중 하나가 ‘만만하게 만화를 보는 인식’ 때문이다.
만화 관련 법규에 보면 ‘불량만화’라는 단어가 있다. ‘만화’ 또는 모든 창작물 분야에서 ‘불량’한 것이 있을 수 있고 ‘양호’한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전체가 ‘불량’하거나 ‘양호’한 분야는 세상에서 흔치 않다. 그런데 ‘불량만화’라는 것은 두 단어의 연결어미도 없어서 그저 만화 전체가 불량에 매달려 있는 표현이다. 정확한 표현은 아닐지라도 ‘불량한 만화’ 정도라면 ‘일부 불량한 만화’라는 본래의 의미를 드러내게 된다.
 
제 9의 예술이라는 우리끼리의 주장으로 만화가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는 산업적으로 이용가치가 폭증하고 있는 만화형식의 창작물 인식과 가치 인식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만화가 모두 예술적 작품으로 몰려야 할 것은 아니지만 만화가 만만하다는 생각에 묶여 있어서도 곤란하다. 최근 미술계 위작 사건과 관련해서 ‘판화 외의 모든 예술품은 단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결국 만화처럼 대량 복제되는 대중문화는 예술이 아니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예술은 ‘하나’라는 희귀성 때문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대하는 이에게 감동을 일으키는 모든 것이 얻을 수 있는 명칭이다. 그리고 만화에는 감동에 더하여 재미와 교훈과 무한한 상상력이 담겨 있다. 가장 쉽게 전달되는 형식이 만만해 보일 이유는 더더욱 아니다. 향후 만화를 둘러 싼 사회 전반에서 만화의 가치를 폄하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만화 칼럼니스트  jjk8646@hanmail.net
2005-11-16 16:5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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