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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학으로 만화 읽기 3

<궁>의 분석을 통한 기호학의 실제 적용

글 | 이수진 (시각예술 기호학 박사 jinaparis@hanmail.net)

 
<궁>1권 표지. 박소희 글 그림, 서울문화사, 흑백, 182쪽, 148X210mm, 소프트커버, 2002. 11월 발행. 2002년부터 <윙크>에 연재된 후 단행본으로 발행되고 있으며, 현재 연재 진행중이다. 가을호에 이어 이번호에서는 소리 공간에 대해 설명하려 한다. 더불어 최근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 <궁>을 통해 기호학의 시각으로 만화를 분석하는 사례도 제시할 생각이다. 기호학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한 만화 작품에 내재된 의미구조와 코드체계를 밝혀내려는 궁극적인 목적의 기본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궁>의 구성 기본 단위
 
<궁>은 흔히 서사형식의 장편만화가 도입하는 관습적인 형식을 존중하고 있다. 단행본의 공통된 크기는 A5판형이고, 소프트커버에 흑백인쇄, 한 권 전체양은 180쪽 안팎이다. 단행본 형태만으로 이 작품이 교양만화 혹은 예술만화가 아님을 우선적으로 감지하면서 독자는 평범한 형식에 재미 위주라는 인상을 갖고 독서를 시작할 것이다.
지면 한 장 한 장을 넘기면서 관찰되는 공간 구성의 특징은 크게 두가지다. 첫째, 플랑쉬1) 공간이 그리 넓지 않기 때문에 한 면에 포함되는 3~4 개 정도의 칸과 지면 전체 편집이 부각된다. 둘째, 칸의 모양은 (정사각형, 세로로 긴 직사각형, 가로로 긴 직사각형 등) 평범한 사각형이 주로 사용되었고, 칸 크기와 위치는 이야기 서술을 중심으로 행동 전개 및 내용 전달에 효과적인 방식에 맞춰 매 칸마다, 매 플랑쉬마다 변화한다. 다시 말해 보여주는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 불규칙적으로 칸의 크기가 변형된다는 것이다. 가령 인물 혼자 서 있는 모습일 때, 세로로 긴 좁은 직사각형 칸이, 인물 여럿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에서 가로로 긴 넓은 직사각형이 각각 다르게 사용된다. 내용이 제일 중요한 관심사라서 칸 자체의 미적 측면은 다소 무시되기도 한다. 만화 단행본에서 가장 자주 관찰되는 형태로, 대부분의 만화가들이 고민없이 쉽게 선택하는 양식, 만화 독자라면 누구나 익숙한 양식이라 하겠다. 칸 분열과 배치가 독서 방향과 리듬에 자연스럽게 일치되는 편이라 이야기에 빠져 줄거리를 따라가기가 쉽다.
 
<궁> 1권 63p세자 이신은 학교에서 자신이 효린에게 청혼하는 것을 들은 여학생(채경)을 길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소문을 퍼뜨리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이 학생에게 겁을 주는데….
옆 그림에서 상단 첫째 칸은 얼굴을 감추고 싶어하는 채경 옆에 다가서서 말하는 장면이다. 인물의 엉덩이 즈음까지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칸은 사각형 테두리로 정확히 구분되었다기 보다는 상단 왼쪽 칸과 하단 칸의 테두리를 공유하고 있어, 일반적인 칸 형태에서 약간 벗어난 변형이다. 신의 얼굴과 채경의 뒷모습이 확실히 드러나고, 게다가 이신의 어조가 높아지면서(아래 말풍선, 글씨체 고딕체로 변화, 진하고 굵은 글씨) 채경을 겁주는 부분을 강조하려는 듯, 플랑쉬의 제일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하단 마지막 칸은 채경의 표정에 관심 집중, 그녀의 놀란 눈동자를 뚜렷하게 볼 수 있도록 칸이 옆으로 길게 분할되었다. 이 칸에서는 느낌표로 상징되는 ‘깨달음과 놀람’, 기호의 굵기와 진하기로 보아 신의 협박이 매우 효과적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장을 넘기면 즉시 그 반응이 나타나, 채경이 얼떨결에 ‘아무한테도 얘기 안했어, 난-’하고 소리치며 신이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만다.
위 편집 방식처럼 <궁> 속에 그려진 칸은 서사 흐름상 강조하려는 대상에 따라 크기가 조절되는데, 이 유연성이 바로 독자를 이야기에 집중시키는 기본적인 형식상의 원동력이라 하겠다.
그림과 병행하여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는 말, 일반적으로 말은 ‘말풍선’이라 불리우는 공간 안에 담겨진다. 글자가 많으면 바람이 빵빵한 풍선처럼 커지고 글자가 적으면 크기가 작아지는 점이 특징인데, 말‘풍선’은 이 점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일반적으로 둥그런 원형일 때가 많고, 누가 말하는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소리의 근원을 표시하는 '꼬리'가 있다. 주로 대사, 독백, 외부에서 들리는 소리 등 그 발화자가 이야기가 전개되는 서사공간 속에 포함된 경우의 말을 담고 있다. 반면 사건 요약, 시간 경과, 장소 변화 등을 알리기 위한 작가의 말은 지문 속에 담긴다.
또한 만화에서는 말이 아닌 소리와 움직임을 문자, 그래픽 기호의 차원에서 의성어 혹은 의태어로 표현하는 방법도 자주 사용된다. ‘꽝꽝’, ‘띵똥’, ‘크크’, ‘찰싹’ 등의 의성어로 지면에 옮겨지는 소리는 말이 아닌 외부 장식이나 인물의 움직임에서 발생하는 소리를 표현하는 방식이고, ‘부들부들’, ‘후다닥’, ‘휘리릭’, ‘스으윽’ 등의 의태어 사용은 움직임을 언어로 재현하는 기법이다. 동영상도 아니고 음향효과도 없는 만화는 사실 인물의 움직임을 고정된 상태로밖에 보여 줄 수가 없다. 이 표현의 한계를 극복하는 수단이 의태어, 상태 변화와 움직임을 표시하는 그래픽 기호의 사용(가령 갑자기 일어서는 움직임은 세로로 그어진 긴 직선으로 표현, 얼굴이 빠알갛게 상기되는 것은 가로로 그어진 짧은 직선 사용 등), 그리고 그 현실감을 살려주는 의성어의 사용이다.
칸을 기준으로 말풍선과 지문은 칸의 내부에, 칸 테두리를 접하면서, 칸 테두리를 걸쳐, 아니면 이웃 칸까지 침범하여 배치될 수 있고, 그림을 기준으로 소리 근원지 가까이, 다른 말풍선을 기준으로 분리되어 혹은 겹쳐서 위치할 수 있다. 칸의 배경 색깔이 컬러일 경우는 물론 흑백일 경우에도 말풍선의 테두리는 검은색, 바탕은 흰색, 문자는 검은색일 때가 많다. 이는 내용을 쉽게 읽도록 하는 관습이지만, 늘 예외는 있는 법. 작가의 의도에 따라 얼마든지 선택이 가능하다. 말풍선은 기본적으로 타원형이 많지만, 칸 모양을 따른 사각형이 쓰이기도 하고, 주가 되는 타원형과 구분되는 의미를 지닌 구름 모양, 뾰족뾰족 모양 등 변형된 원형이 도입되기도 한다.

<궁>에서는 이와 같은 소리 공간들이 모두 골고루 섞여 사용된다.
인물이 직접 자신의 목소리로 대화한다고 여겨지는 대사 부분의 말풍선은 크게 구불구불 곡선 테두리를 가진 변형된 원형과 타원형(그림2왼쪽 참고)의 2가지 형태를 띄고 있다. 대화체 말풍선에 들어가는 말은 보통 크기, 명조체 글자로서 보통 크기의 목소리를 암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어조가 높아질 때, 고딕체로 바뀌면서 굵고 진해지기도 하는데 이 경우 소리지르는 외침형과는 달리 차분한 상태에서 목소리만을 높이는 듯한 상황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겠다. 반면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소리치는 경우의 외침형 말풍선은 뾰족뾰족 변형된 원형이다. 그 속의 글씨는 굵기가 진하고 크기가 커짐과 동시에 고딕체로 변화한다. 이 어조보다 더 뚜렷이 구분되는 확실한 효과가 필요한 상황에서는 손으로 쓴 듯한 글씨체에 굵기나 크기가 다른 일반 말풍선의 말보다 훨씬 진하고 큰 형태(아래 오른쪽 참고)가 사용되고 있다.
<궁> 2권, 177p 일부, 1권 78p 일부
  
<궁>에 나타난 말풍선 속에 포함된 인물간의 대화 특징은 고등학교 여학생의 말습관이나 궁중 인물들의 어조 혹은 궁중 용어, 신이 왕세자로서 또 고등학생으로서 사용할 법한 말투 등을 각 인물과 상황에 적절하고, 읽기에 감칠맛나게 전달한다는데 있다.
대화 말풍선은 인물이 실제 말한다고 간주되는 말만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그 인물의 감정이나 내면까지 명료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등장인물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표시한 말풍선의 역할이 중요해 진다.
<궁> 에 사용된 ‘인물 생각 말풍선’을 공통적으로 아우르는 특징은 원형의 테두리가 비교적 넓게 디자인되고 말 꼬리가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물의 얼굴 주변에 위치하면서 상황에 따른 인물의 생각을 담아낸다. 그림3에서 제시된 ‘번개 원형’과 ‘먹 원형’이 <궁> 단행본 전체에서 가장 많이 관찰된다. 형태야 어떻든 모든 ‘인물 생각 말풍선’은 한 줄로 정확히 그려진 원형이나 구불구불 테두리 곡선의 자유스러운 형태가 쓰인 대화 말풍선과 비교해보면 그 구분이 선명해진다. 특히 의미 전달 차원에서 다른 등장인물에게 실제 들린다고 간주되는 대화 내용보다 더 자세히 주인공 각각의 심리를 표현해주고 있기 때문에 독자의 인물에 대한 이해도를 증가시키고, 나아가 독자와 주인공 사이의 친밀감을 조성하도록 도와준다.
<궁> 1권 18p 일부, 41p 일부
<궁>은 그 시공간적 배경이 독자들에게 친근한 21세기 서울이라고 하여도, 이야기가 배경으로 설정한 정치적 환경이 현실과 다소 동떨어진 입헌군주제라는 거리감 때문에 지문을 통한 서술 화자의 직접 개입이 부각되고 있다. 또한 지문은 서술 배경에 대한 설명이나 궁중 용어, 궁중 생활 방식과 관련된 참고 지식을 위해서도 쓰인다. 사각형태로 칸 한 쪽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독특한 모양 테두리의 원형, 한 칸을 전부 차지하는 경우, 칸과 칸 사이 여백을 가로로 넓게 이용하는 등 다양한 형태가 도입되고 있다.
소리공간에 담긴 말은 결국 그림으로만 이해되지 않는 칸들의 연관성을 정확히 밝혀 주거나, 이미지 사이에 다리를 연결해 그 이해를 도와 주는 등 그림이 할 수 없는 측면을 보충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주인공의 감정을 상세하게 표현하면서 감정 이입의 효과를 증가시킬 수 있다. 인물 간의 충돌이나 의견 대립에서도 말에 의존하여 구체적으로 상황을 묘사하기도 한다.
만화의 독서 리듬이 말의 양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 역시 염두해 둘 필요가 있다. 그림을 읽는 시선은 거의 순간적이지만 말을 읽는 시선은 그 내용이 끝날 때까지 같은 말풍선 안에 머문다. 말은 결국 만화에서 읽어야만 하는(이미지도 자세히 관찰해야 하는 대상이지만) 의무 조건, 시선이 머무는 지점이라 하겠다. 이 말의 양이 바로 만화 전체 독서 리듬을 빠르게 혹은 천천히 만드는 주요소인 것이다. 가끔 말을 다 읽고 나서 그림을 다시 보기도 하는데, 이는 말의 이해를 통해 인물의 행동이나 제스처, 배경의 세밀한 부분에까지 관심이 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림과 말 사이를 오고 가는 독서를 통해 진정한 의미가 해독되는 것이며, 말풍선과 지문은 그림과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는 열린 공간인 것이다.    
 
<궁>의 특성
 
<궁>에서는 순정만화의 주인공은 멋지고 예뻐야한다는 불문율의 영역을 인물 ‘망가뜨리기’ 방식, 즉 주인공을 짧달막하고 얼굴 큰 3등신으로 변형시키면서 코믹한 표정과 행동, 개그 상황을 연출하는 방식이 침범하고 있다.
 
<궁> 2권 177p 중간단 오른쪽 칸신과 채경이 채경의 친정집에서 보내는 2주일 동안의 사건 부분이다. 집에 둘이만 있을 때, 신이 배가 고프다며 먹을 것을 찾자, 채경은 라면을 준비한다.
첫 번째 그림에서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채경의 목소리 ‘신아, 나… 네가 너무 좋아’ 그리고 그 아래 칸에는 신이의 놀란 얼굴 표정이 보인다. 서스펜스를 살리는 편집방식이다. 독자의 관심은 모두 바로 그 뒷 장면으로 집중되고, 과연 이 대화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알기 위해 빨리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그러면 바로 오른쪽 그림에서 망가진 얼굴, 코믹한 표정으로 채경이 ‘신’라면을 들고 서 있다. ‘네 국물맛은 일품이여… 면발은 쫄깃쫄깃-’. 크크 웃긴다.
순정만화 <궁>의 여주인공, 약간 ‘푼수’이긴 하지만 예쁜 세자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코믹만화 주인공같은 재미있는 그림체가 말이 자아내는 웃음을 배로 증가시키고 있다. 신의 이름으로 농담하는 장면은 3권 전반부에서 다시 등장한다. 이번에는 ‘꼬랑내’ 나는 신발을 가지고. 하지만 첫 번째만큼 효과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첫 번째 개그가 상상밖의 결정타였으므로, 같은 방법이 두 번 연속된만큼 그 효과가 반감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이기도 하겠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두 번째 ‘신’ 개그 뒤 연속되는 칸들을 통해 독자가 채경의 신에 대한 진지한 감정 고백을 감지하기 때문이다. 신이 방으로 들어가버린 후, 신발을 만지면서 채경이 말한다. ‘신아, 나. 아무래도 너를….’ 이때 채경은 본래 모습의 8등신, 예쁜 순정만화 주인공의 그림체 그대로이다. ‘너를….’ 뒤에 생략된 말은 이미 코믹스러운 장면에서 주어졌으므로 독자의 해석에 맡겨도 충분할 것이다.
<궁> 작품 전체에서는 종종 ‘주인공 망가뜨리기’를 만날 수 있다. 1권부터6권까지는 다양한 상황에서 예측불허의 말과 행동을 연발하는 채경을 중심으로 개그 상황이 연출되는데, 젊은 세대의 신조어 ‘오바한다’란 표현이 딱 어울리는 그녀의 과장된 행동 양식, 과장된 감정 표현이 바로 ‘웃기는’ 이유인 것이다. 반면, 7권에는 다소 냉소적이고 침착한 캐릭터2)인 신까지 합세한다. 특히 합방 사건 이후 수상한(?) 상상을 반복하는 상황과 맞물려 남자 주인공이 ‘망가지면서’ 코믹해진다. 결론적으로 볼 때, 주인공들이 코믹한 모습으로 바뀌는 부분은 심각한 상황, 중요한 순간, 특히 신과 채경의 관계에 있어 결정적인 순간에, 분위기를 깨는 듯 포함된다.
<궁>의 또 다른 특성은 순정만화 등장인물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전혀 예쁘지도 멋있지도 않은 ‘엽기적’ 인물의 등장이다. 공내시와 한상궁. 소개말에 의하면 공내시는 ‘상궁 아지매들의 영원한 젊은 오빠이자 꽃미남 내시의 원조격 조선조 마지막 내관’. 이야기 흐름상 간간히 등장하여 늘 엽기적인 외모와 행동으로 독자를 웃게 만드는 인물이다. 유사한 캐릭터의 수랏간 최고 상궁 한상궁3)도 마찬가지. 재미있는 점은 한상궁이 공내시의 누나 혹은 동생처럼 파격적인 외모를 닮았다는 것이다. 공내시처럼 매순간 황당한 이야기를 하는 인물은 아니더라도, 6권에서 공내시와 함께 등장하는 부분을 통해 한상궁 역시 같은 맥락에서 설정된 코믹 캐릭터임을 감지할 수 있다.
<궁>의 세 번째 특성은 순정만화의 관습적 유형 패러디와 <궁>자체 비판을 통해 유머를 전달하는 방식에 있다.
 
채경은 친구와 쓰레기를 버리러 소각로로 가던 중 왕세자와 마주친다. 그가 헌 실내화를 통 속에 집어던지는 순간 한 짝이 채경의 팔에 맞지만 사과도 없이 가려 하는데….
 
1권 26p, 27p 일부이 부분에서 순정만화가 흔히 취하는 남녀 주인공의 첫 만남에 대한 패러디가 사용된다. ‘잠깐, 이럴 때 대체로 순정만화 주인공들은 이렇지 아니하던가….’ 두 주인공의 첫 만남은 만화 속 황당한 설정을 비웃으면서 사실적인 접근으로 구성될 것이다. 왕세자는 너무 평범한 채경을 무시한 채 지나가고, 뒤돌아 자기 갈 길을 가는 신에게 채경이 소리치는 몇 마디. ‘에라잇, 폭력왕세자 같으니 ! 저런 애하고 결혼할 여잔 고생길이 훠언~하다. 훤해~ !!!’. 정략 결혼을 명받고 고민에 빠져있던 왕세자에게 ‘결혼’이란 단어는 신경을 거스리는 말. 그제서야 화가 나서 돌아본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채경은 그새 친구와 왕세자의 헌 실내화를 두고 실랭이를 벌이고 있다. 다른 순정만화 여주인공을 패러디하며 독특한 행태의 행동 방식으로 설정된 채경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그래서 코믹하지 않을 수 없다.
3권, 채경이 친구 승목에게 정략 결혼의 내막을 알리려 할 때 신이 야단치는 장면에서 작가가 자신의 스토리 구상을 스스로 비판하면서 직접적인 방식으로 만화임을 인식시키는 거리두기를 발견할 수 있다. 신이 ‘야 그럼 십몇 년 전에 할아버지들끼리 반지 하나 주고받으면서 젖도 안 뗀 손주들을 약혼시키게 됐다는 그런 중세 판타지나 무협소설에서 나올 만한 얼토당토 않은 어설픈 스토리가 웃기지 안 웃기냐?’라고 하자, 이 말이 들어간 칸의 한 구석 지면을 말아 올리며 갑자기 작가가 등장하여 외친다. ‘야 이 자식아~ !!’
패러디를 사용하거나 자체 비판을 통한 거리두기는 사실 서사공간 속 인물은 공유할 수 없는 차원의 유머라 하겠다. 만화를 둘러싼 문화적 지식을 바탕으로, 만화 표현수단을 이용하여, 작가가 독자에게 보내는 농담이기 때문이다. 이 코드를 잘 이해하고 동참하면 동참할 수록 <궁>읽기가 재미있어 질 것이다.
<궁>은 사실 심각하고 슬프고 무거운 만화가 아니다. 젊은 작가의 감각이 잘 살아 있는, 젊은 세대의 취향에 맞는, 웃기고 재미있고 엉뚱하고 개성있는 만화이다. 만약 오늘날 젊은 세대의 감각을 만화를 즐기는 취향을 통해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다면, 너무 심각하고 무거운 분위기나 철학적이고 어려운 주제, 복잡하고 애매모호한 줄거리보다는 재미있고 독특한 구성, 잘 짜여진 인물 설정 구도, 단순하면서도 설득력있는 이야기를 선호한다고 할 수 있겠다. <궁>이 바로 이 감각에 딱 맞는 만화가 아닐까 ? 그리고 그 원동력은 바로 ‘주인공 망가뜨리기’, ‘엽기적 캐릭터’, ‘거리두기’를 비롯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야기의 흐름과 독서 리듬을 조절하여 분위기가 한 쪽으로 몰리지 않게 하는 균형감에 있다. 줄곧 세자 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음모로 심각하지만도 않고, 아름답고 멋진 남녀 주인공의 사랑이야기에 빠져 달콤한 분위기만 그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코믹한 상황을 반복하여 유치한 개그를 끌지도 않는다. 만약 순정만화를 대표하는 아름답고 멋진 주인공의 기본 그림체없이 매번 주인공이 망가지고, 똑같은 방식의 개그를 반복한다면 처음에는 효과적이었을 상식깨기도 결국은 매너리즘 때문에 식상한 유머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마찬가지로 작가의 존재가 너무 많이 드러나 인물과의 공감대를 제대로 형성하지 못하면 이 또한 어설픈 거리두기가 될 것이다. 작품의 내용을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독자의 감정 몰입을 방해하지 않는 수준에서, 적절하게 조절하여 끊고 맺을 때를 제대로 포착하는 지혜가 <궁>을 1권부터 7권까지 아니 점점 더 흥미롭게 만드는 비밀의 열쇠라 하겠다.
 
각주)
1) 플랑쉬(planche) : 도판. 작가(혹은 출판사)가 미리 정한 단행본 크기의 지면 한 쪽 공간을 지칭하는 만화 전문 용어. 프랑스어에서 차용했다.
2) 신은 늘 비슷한 어조와 어투를 유지한 채 세자로서의 자신감과 침착함을 잃지 않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참고로 작가의 말 ‘알아요, 알어…얜 오바하면 안되는 캐릭터지….’<궁>2권, p.98.
3) 한상궁? 한 때 국민드라마라고 불리우던 TV연속극 <대장금>의 수랏간 최고 상궁이 한상궁 아니었던가. 아니나 다를까. 첫등장과 함께 그녀의 ‘주제가’, ‘오나라 오나라 아주 오나~ 가나라 가나라 아주 가나~’노래가 들린다. 
2005-11-21 18: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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