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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기사
박흥용의 만화관과 작품 세계

대화의 광장으로 열린 길

 
 글 | 박종천(한신대 디지털문화콘텐츠학과 강사, baummensch@hanmail.net)
 
“사람이 길을 넓힐 수 있는 것이지, 길이 사람을 넓혀 주는 것이 아니다(人能弘道, 非道弘人)”
- 공자(孔子)의 <논어(論語)>에서 -
 
1. 시스템의 구속을 뛰어넘는 작가의식과 개성의 출현
 
박흥용. 남다른 상복(賞福)과 더불어 ‘작가주의 작가’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니는 작가. 만화가 지망생들이 가장 부러워하고 만화평론가들의 찬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작가. 만화평론가 함성호는 그를 두고 ‘90년대 한국만화의 성과’라고 평가했다.1)
박흥용은 한국만화사에서 흔히 ‘공장’과 ‘대본소’로 대표되는 만화의 생산-소비 체제에 길들여지지 않은 진지한 작가의식과 창조적 개성의 표현으로 대중성을 확보한 보기 드문 사례다. 그가 만화계에서 흔치 않은 호평을 받았던 것도 작품의 깊이와 넓이를 제대로 확보하여 작가와 독자의 행복한 만남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잘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치열한 작가의식. 그림틀과 그림체를 놓고 내면적으로 치열하게 고민하는 만화가의 자의식과 고민을 잘 드러내는 장면. <경복궁학교>, 3권, 68-69쪽.
영화계에서는 할리우드 제작시스템이 그랬듯이, 80년대 이후 한국에서 상업적으로 기획되고 제작되는 만화 역시 최소한의 흥행을 보장하는 안전한(?) 선택을 위해 정형화된 장르의 문법과 단순하고 평면적인 캐릭터, 그리고 상투적인 이야기 전개방식을 선호했다. 그 결과 작가의 개성이 보이지 않는 만화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였다. 특히 80년대 이후 한국만화는 <공포의 외인구단>의 성공 여파로 갈수록 그림체가 독자의 구미에 맞게 매끄러워지면서, 진중한 문제의식이나 형식적 실험에 기반한 다채로운 개성보다는 깔끔하고 가벼운 호흡의 전형적인 갈등구조와 이야기 전개가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마치 이수일-심순애-김중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신파극의 삼각관계를 만화적으로 재구성한 듯한 오혜성-엄지-마동탁의 정형화된 캐릭터들이 빚어내는 이야기 구도는 숱한 아류의 등장으로 이어졌고, 뒤이어 불어닥친 일본만화의 영향은 작가의식과 창조적 개성을 더욱 질식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은유와 미장센의 활용. 쫓기는 어린왕자와 돈과 오버랩된 괴물의 대비가 좌우/대소의 대비와 대각선으로 이어지는 곡선으로 속도감을 형성하는 적절한 미장센으로 나타나고 있다. <어린왕자의 노래>, 26-27쪽.이런 상황 가운데 박흥용의 등장은 한국만화사에서 만화에 대한 진지한 작가적 고민과 개성적 실험이 지닌 가능성을 유감없이 보여준 일대사건이라고 할 만하다. 박인하에 의하면, 80년대 후반 박흥용, 이희재, 오세영 등은 기존 대본소만화의 관습적인 패턴을 파괴하는 작품으로 한국만화의 뉴웨이브를 이끌었다.2)  이현세가 오혜성으로 대표되는 스타 캐릭터와 정형화된 인물들의 갈등 구조에 근거한 이야기 전개의 전형을 대표한다면, 박흥용은 메시지에 걸맞는 이야기를 구상하고 가장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 이야기의 구조·리듬·호흡을 고려한 그림체와 캐릭터의 창출을 잘 보여준다. 그리하여 이현세의 만화에서 이야기와 거기에 담기는 메시지가 정형화된 캐릭터들의 갈등구조에 의해 필연적으로 결정되는 경향이 있고 그에 따라 늘 같은 주인공이 배경만 달리한 채 등장하는 반면, 박흥용의 만화에서는 그림체와 캐릭터의 성격이 메시지와 이야기를 위해 철저하게 조율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상황마다 전혀 다른 주인공들이 새롭게 나타나게 된다.
 
2. 사실주의와 형식주의를 조율하는 작가주의의 완성
 
박흥용의 만화는 분명히 메시지→이야기→캐릭터→그림체로 이어지는 작품 구상과 창작의 동선(動線)을 보여주고 있다. 메시지의 앞에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당대 사회의 현실이 놓여있고, 그림체의 다음에는 만화를 읽는 독자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하여 이러한 구도를 의식한 채 창작된 작품들은 종종 사회적 현실의 문제를 예리하게 포착하는 사실주의(realism) 계열의 만화로 이해되곤 한다.3)
1. 몽타쥬의 만화적 활용. 돈의 노예로 사는 어른들과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이 시각적으로 대비되는 장면. 시간적으로 이어지는 영화의 몽타쥬와는 달리 독자의 시선에 따라 만화적 몽타쥬가 완성된다. <어린왕자의 노래>, 84-85쪽. 2 카메라 렌즈의 시선 활용. 술취한 주인공이 일어나는 과정을 주인공의 시선을 대신하는 카메라 렌즈처럼 포착하여 표현하고 있다. <백지>, <박흥용 1986~1992>, 276-277쪽. 3 심리적 상태를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주의 기법. 흑백의 대비와 세부묘사가 되는 주인공과 윤곽만으로 표현된 화자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안경으로 들어오는 주인공에 대한 묘사는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자아에 대한 통찰을 드러내고 있고, 어둠 속에서 시계숫자의 괴롭힘을 당하는 주인공에 대한 묘사는 외로움과 절망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무인도>, 100-101. 21쪽.실제로 그의 작품에는 억압받고 소외당한 약자들에 대한 묘사와 광주민주화운동을 비롯한 당대의 사회현실에 대한 예리한 포착이 자주 눈에 띈다. 또한 <무인도>의 복동이가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사회적 욕망에 휘둘리느라 대화가 단절된 가족을 배경으로 한 주인공이라면,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견자(犬子)는 사회적 욕망의 억압을 강요받는 신분적 한계를 드러내기 위한 캐릭터이고, <내 파란 세이버>의 쌕쌕이가 삶과 죽음의 의미를 수용하기 위한 통과의례를 치르기에 적합한 청소년으로 묘사된다면, <호두나무 왼쪽 길로>의 박상복은 여행을 떠나도록 생명의 근원인 부모님을 상실한 존재로 설정된다. 이처럼 각 캐릭터는 현실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만화적으로 표현하기에 적합하도록 형상화되었다. 초기의 단편작품부터 “약하고 소외된 이들의 현실을 본 대로 들은 대로 그림으로 그리고 기록했다”고 고백한 작가의 육성도 그런 사실을 뒷받침한다.4) 그러나 그의 만화는 다큐멘타리가 아니다. 함성호의 지적처럼 그의 만화에서 시대적 배경은 이야기의 합리성을 위해 존재하며,5)
작가 스스로 증언했듯이 그의 작품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부조리한 현실은 작품의 메시지를 드러내는 배경 혹은 환경에 지나지 않는다.6) 작품의 목적은 현실의 재현이 아니다. 이 대목에서 박흥용은 사실주의를 넘어선다.
실제로 작가는 초기부터 만화적 상상력을 형식적으로 구현하는 형식주의(formalism) 표현기법의 다양한 실험을 선보였다.7)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은유와 상징의 적극적 활용, 심리적 상태를 시각적 이미지로 변형시켜 나타내는 표현주의적 기법, 작품의 호흡과 리듬을 살리기 위해 도입되는 청각/음악적 효과, 셔레이드/클로즈업/몽타쥬/미장센 등의 영화적 기법과 옴니버스적 에피소드 구성을 만화적으로 적절하게 수용하는 방식 등이다.
예컨대, 초기작인 <어린왕자의 노래>를 살펴보면, 어린왕자를 쫓는 죽음의 괴물과 돈을 오버랩시키면서 자본주의사회의 병폐를 비판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괴물(돈)의 추격장면은 각박한 자본주의 사회의 압박감을 심리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 돈=괴물=죽음=일상성과 어린왕자=동심=생명=초월성의 상징을 중심으로 돈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돈의 노예가 된 어른들과 동심의 순수성으로 죽음의 일상을 초월할 가능성을 지닌 아이들을 대조적으로 표현한다.
한편, 곡선으로 이어지는 돈의 궤도에서 벌어지는 급박한 장면이라든가, 돈의 노예로 사는 어른들과 아이들의 발랄한 동심이 만개하는 장면의 교차편집 등은 독자들의 시선을 이끄는 리듬과 호흡을 조율하는 동시에 공간적 배치와 시간적 편집에 따른 미장센과 몽타쥬 효과를 잘 보여준다. 확실히 박흥용은 카메라 렌즈의 시선을 의식적으로 잘 활용할 줄 아는 작가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적 효과는 영화적 기법의 전적인 도입이라기보다는 만화적 변용이라고 보아야 한다.
또한, 박흥용은 시각적인 효과를 통해 주인공의 미묘한 심리를 표현함으로써 독자의 심리를 움직이기 위해 강렬한 표현주의적 기법을 도입하고 있다.8) 예컨대 <무인도>를 살펴보면, 주인공 외의 인물들이 얼굴의 세부묘사를 과감하게 생략한 채 대화가 진행되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대사 내용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등장 인물들의 익명성을 독자의 개연성을 변용시키는 기능을 한다. 이러한 장면은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만화적 특성을 잘 드러낸 것이다.
더불어 주목할 만한 것은 청각/음악적 효과의 활용이다. 이 부분에서 박흥용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독보적이다. 작가는 이미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표현한 토속적 리듬의 춤사위, <경복궁 학교>의 경복궁 타령과 어우러지는 춤사위, <호두나무 왼쪽 길로>의 아리랑과 그에 어우러진 사연을 담은 자연환경의 묘사 등을 선보인 바 있으며, 최근 단편작 <삐이이이>에서는 막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이의 삐삐신발의 소리와 임종을 맞는 할아버지의 심장 멈추는 소리가 오버랩되면서 생명과 죽음의 상관관계를 아이가 신은 신발의 빨간 색과 할아버지가 흘리는 눈물의 푸른 색의 관계와 교차시켜 공감각적 느낌을 자아내기도 했다.
1 청각/시각적 효과의 연출. 생명력 넘치는 아이의 빨간 신발과 임종을 앞둔 노인의 파란 눈물이 대비되며 교차편집되다가 죽음과 생명의 상관관계가 상징적으로 응축되는 장면. <삐이이이>, <계간만화> 2004년 여름호, 102쪽. 2 홈통의 활용을 통해 앞으로 전개될 옴니버스적 에피소드의 구성을 예고하는 장면. <무인도>, 55쪽. 3 독백체의 단편의 호흡과 리듬. 자아를 상징하는 백지에 낙서를 채우는 것으로 욕구불만의 실존적 자의식을 강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백지>, 283-284, 299-300쪽.
<어린왕자의 노래>에서 노점상, 버스차장, 장님악사 등으로 이루어졌던 옴니버스적 에피소드 구성은 <무인도>를 거쳐 더욱 정교해지면서 그의 후기 장편작품에도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인데, 일정한 반복에 따라 고조되는 작품의 호흡과 리듬을 통해 메시지를 각인시키는 효과를 자아낸다. 특히 작가의 실험정신이 잘 나타난 <무인도>의 경우에는 기차에 오른 주인공과 한칸에 탄 승객들을 각각 나누는 홈통을 통해 앞으로 전개될 옴니버스의 에피소드들을 한 페이지에 압축시켜 미리 보여주는 장면이 흥미롭다. 옴니버스를 구성하는 각 에피소드들은 하나의 메시지를 향한 이미지 변형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거듭될수록 주인공과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가는 독자의 내면세계는 질적 성숙의 계단을 한걸음씩 오르게 된다. 그러한 효과는 <호두나무 왼쪽 길로>에서 절정에 이른다.
박흥용의 작품세계는 현실을 경험하고 수용하며 메시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는 사실주의적이지만 그것을 만화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는 형식주의적이며, 그러한 과정을 전체적으로 조율하는 측면에서는 작가의 개성이 오롯이 드러나는 작가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작품이 지닌 사실주의적 경향이 주로 작품의 넓이를 마련한다면, 형식주의적 흐름은 작품의 깊이를 한층 더하고 있으며, 작가주의는 작품의 대중성과 예술성을 적절하게 연계시키는 작가의 개성적 연출로 완성된다.
1 나그네로서의 주인공. 자아 안에 공존하는 빛과 어둠, 음과 양을 잘 드러내는 쌍판의 얼굴, <그의 나라>, 2권 표지.  2 대화체의 장편. 내면적으로 성취되는 초월의 의지와 자유의 비상을 표현한 장면들. <무인도>, 110-111쪽, <내 파란 세이버>, 10권, 164-165쪽,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2권, 58-59쪽.
 
3. 단편의 독백에서 장편의 대화로
 
박흥용의 작품세계는 진지한 자의식을 직선적이고 압축적인 호흡과 리듬에 담은 단편에서 점차 유연하고 유장한 호흡과 리듬을 실은 장편으로 전개되어 왔다. 초기 단편들이 대체로 사회적 강박의식에 눌린 독백의 넋두리에 가까워서 독자들의 감성을 너무 앞지르는 경향이 강한 반면, 후기 장편들은 독자들의 시선과 호흡에 공조하면서 때로는 그러한 시선과 호흡을 자아내기도 하는 대화의 리듬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혼자만의 독백에서 독자와 주거니받거니 하는 대화로 이행하는 원숙함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행은 대체로 작가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사회를 향해 여과 없이 표출하던 감정을 내면적으로 승화시키는 내면화 경향을 반영하고 있으며, ??국민일보??에 연재했던 <검>을 기점으로 그러한 경향이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박흥용의 작품세계는 사회적-비판적 성찰에서 내면적-구도적 성찰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초기에는 강렬하지만 폐쇄적인 실존적 자의식과 사회적-비판적 성찰이 엉키면서 출구를 찾지 못하는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냈으나, 후기에는 성숙한 여유가 배어나는 개방적 자의식과 내면적-구도적 성찰이 맞물리면서 사회적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개인적으로 그것을 초월하는 내면적인 자유를 획득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1986년작인 <백지>에서는 사회적으로 실현할 수 없는 욕구불만의 실존적 자의식이 결국 자위행위나 다름없는 낙서와 구토로 형상화되었던 데 비해,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나 <호두나무 왼쪽 길로>에서는 사회적 존재의 한계를 수용하면서 내면적 성숙에 이르는 여정이 잘 표현되고 있다. 이에 따라 급박한 호흡을 담은 거친 펜선과 불안정한 심리를 대변하는 화면 구성과 시선처리는 어느덧 유연한 호흡에 유려한 펜선과 안정적인 화면구성과 시선처리로 거듭난다.
독백에서 대화로의 변화는 사회적으로 규정당한 자아와 사회를 초월하면서도 그 사회를 끌어안는 자아로의 변모를 보여주는데, 이는 작가 개인의 통과의례인 동시에 한국사회의 통과의례이기도 하다. 초기작품에서는 구조적으로 좌절될 수밖에 없는 욕망으로 뭉쳐진 자의식을 거침없이 내뱉음으로써 자기애의 표현에 불과하던 것이, 시대상황의 변화와 더불어 작품을 독자와의 교감과 대화의 장으로 삼은 후기작품에서는 허영만과 백성민을 아우르면서도 자기류를 구축한 독특한 개성으로 나타난다.
1 과거와 현재의 오버랩. 문제의 해소를 통해 내면적 자유를 얻은 성장과 성숙을 극적으로 나타낸다. <호두나무 왼쪽 길로>, 5권, 191쪽.  2 문제의 해소와 정신적 성숙. 견자의 스승인 황정학은 자신을 가두어 둔 독을 깨고 나오지만 맹인인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자 견자와 함께 검을 수련하며 현실적 한계인 구름을 벗어난 달의 초월적 경지를 성취한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1권, 120-121, 3권, 18쪽. 이러한 변화의 핵심에는 나그네로서의 주인공이 있다. 박흥용의 작품, 특히 장편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대개 필연적으로 여행을 떠나는 나그네로 설정된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견자, <내 파란 세이버>의 쌕쌕이, <그의 나라>의 쌍판 등은 삶의 목적을 찾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모두 사회적 울타리가 되어 줄 아버지와 근원적 감성의 텃밭인 어머니가 없거나 혹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 전제되고 있다. 그리하여 주인공들은 그러한 상황의 자각으로 인해 욕망의 주체로서의 자아를 발견하지만, 그 욕망은 애초부터 현실적으로 성취불가능한 비극적 욕망인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비극적 욕망을 지닌 박흥용 만화의 주인공들은 그러한 현실을 냉철하게 수용하면서도 그러한 현실을 넘어설 초월적 소망과 의지를 버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길과 여행, 오토바이, 기차, 사이클 등은 사회적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일탈의 욕망을 넘어서서 개인과 사회의 갈등을 성숙하게 수렴하는 통로이자 사회적으로 주조된 현재의 나로부터 떠나 내면 깊은 곳에 잠재된 나를 만나는 계기로 기능한다.
역설의 미학. 생명을 인도하는 지팡이와 죽음을 선고하는 칼은 역설적으로 공존한다. 견자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기저귀끈으로 묶인 아이가 엄마를 향해 가려고 바둥거리고 있는데, 기저귀끈은 구속와 보호의 역설적 공존을 드러낸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2권, 269쪽, 3권, 264-265쪽.그리고 그 여행은 계단처럼 연결된 채 진행되는 에피소드를 거치면서 주로 젊은 여성과 혹은 나이든 어르신을 길안내자 혹은 길벗으로 삼아 현실적으로 단절된 근원으로 복귀함으로써 내면적 성취와 자유를 얻는 보상에 이르게 된다. 과거와 현재 혹은 어린 시절과 장성한 모습을 오버랩시키는 작가의 의도 역시 그것을 뒷받침한다.
물론 그것이 현실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문제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문제는 사회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성숙에 따라 해소된 셈이다. 작가와 대화를 나누며 함께 그 길을 걷다 보면, 독자들은 어느새 사회적 현실에서 어느정도 자유롭게 바뀐 자신을 체험하게 된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 잘 나타나듯이, 구름으로 비유되는 현실을 벗어난 달의 성취와 자유는 사회적 한계 내에서 문제정황을 해소하는 정신적 자유인 것이다.
드디어 박흥용은 단편의 응축된 실험정신과 문제의식을 장편의 유장한 호흡에 녹여내는 데 성공하였고, 이는 형식과 내용의 유기적인 연결을 통해 현실주의와 표현주의의 행복한 결합을 잘 보여주고 있다.
 
4. 대화의 광장으로 이끄는 여운과 역설의 미학
 
박흥용은 최근 <경복궁 학교>와 <호두나무 왼쪽 길로>를 거치면서, 초기 단편에 진하게 배어있던 강박증적 자의식에서 벗어나 좀더 여유롭게 사회를 포용하는 열린 시각으로 독자들을 함께 여행할 길벗으로 초대하고 있다. 그리하여 <호두나무 왼쪽 길로>에서는, 박인하가 잘 지적했듯이, 주인공은 화면에서 사라진 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열린 서사의 새로운 경지에 이른다.9) 이제 그의 길은 한명의 주인공에 의한 단선적 시선에서 벗어나 여러 가지 시선들이 각기 제 목소리를 내는 대화의 광장으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박흥용 특유의 음악적 리듬을 만드는 춤사위.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1권, 144-145쪽. <경복궁 학교>, 38-39쪽.그 길은 이미 만들어진 채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길이 아니다. 작가와 독자가 함께 걸음으로써 더 넓어지는 길, 아니 대화의 광장이다. 길이 사람을 넓혀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길을 넓혀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광장에서 작가와 독자의 경계는 무너지고, 경복궁 타령이나 아리랑 가락에 장단 맞추어 다양한 개성과 사연을 지닌 사람들이 어우러지게 된다.
이러한 만남의 길, 대화의 광장을 열기 위해 박흥용은 상징과 은유의 적절한 운용과 더불어 치열한 갈등을 해소하는 역설의 미학을 마련한다. 초기 작품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치열한 자의식이 ‘백지’로 상징되는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이었다면, 후기 작품에는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과거와 현재, 현실과 이상이 역설적으로 공존하는 삶의 진상에 대한 성숙한 깨달음이 담겨 있다.
그의 작품 속에서 길을 떠나게 하는 역동성이 무인도, 뜬섬, 칼과 지팡이, 음과 양이 공존하는 쌍판 등으로 형상화되는 역설적 공존의 상징과 은유에서 비롯된다면, 그로 인해 풍성해진 작품의 깊이는 옴니버스의 에피소드를 통해 넓이를 확보하게 된다. 옴니버스의 에피소드들은 성숙의 여정을 드러내는 길이나 한국적인 음악적 리듬과 춤사위를 통해서 연결된다. 다른 만화에서 보기 힘든 박흥용 만화의 리듬은 개인과 사회, 작가와 독자를 아우르는 이야기로 거듭난다. 이렇듯 박흥용이 펼치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순간에 이르게 되고 어김없이 그러한 상징과 은유와 만나게 된다. 이러한 이야기 전개방식을 통해 장편의 호흡에 단편의 리듬이 자연스레 스며들고, 닫힌 결말이 아니라 열린 결말의 서사구조는 여운을 남기는 마무리로 이어져서, 결국 만화를 통해 현실 속에 새로운 길이 생기게 된다.
만화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모든 만화인들의 영원한 화두일 것이다. 이에 대해 박흥용은 “대화의 광장으로 열린 길”이라는 진지한 답변을 내놓았다. 우리는 이러한 화두를 들고 용맹정진하는 작가의 작품을 대할 수 있어 행복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행복에 너무 취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박흥용이 일구어가는 길은 천재적인 재능이나 기적이 아니라 종이와 잉크를 낭비하지 않기 위해 미련할 정도로 최선을 다하며 결실을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그와 같은 농심(農心)을 지닌 만화인들이 “만화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들고 용맹정진하는 한, 누가 뭐래도 한국만화의 미래는 밝다.
 
각주)
 
1) 함성호, <만화당 인생>(마음산책, 2002), 25쪽.
2) 박인하, <무인도>, <날자! 우리만화>(만화평론가협회 편, 교보문고, 1998), 134쪽.
3) 이러한 독법으로 박흥용의 초기 단편들을 분석한 비평으로는 정준영, '낙서를 통한 성찰', <박흥용, 1982~1992>(청년사, 2004), 396-405쪽이 대표적이다.
4) 박흥용, '여는 글', <박흥용, 1986~1992>(청년사, 2004), 5쪽.
5) 함성호, 앞의 책, 30-31쪽.
6) 임화인, '박흥용 인터뷰: “참 생명은 세상이 흐르는 대로 떠내려가지 않는다”', <월간 말>, 2000년 4월호 참조. 
7) 형식주의적 관점으로 박흥용의 작품세계를 분석한 평론으로는 함성호, 앞의 책, 25-34쪽, 박인하, 앞의 글, 132-140쪽, 박관형(필명 Halim), '무인도에 가기 혹은 빈자리 찾기'(웹진 <두고보자>, 2002년 1월 5일)이 대표적이다.
8) 박흥용의 표현주의적 기법에 대해서는 박인하, 앞의 글 참조.
9) 박인하, <'호두…'에 대한 사유 - 박흥용류 만화에 대해> (<호두나무 왼쪽 길로>, 2권, 황매, 2003), 225-231쪽 참조. 
2005-11-23 1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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