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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 반전! 한순간도 놓치지 마라! - <1999년생>

인 더 만화 수프 | 만화, 타 문화와 만나다

글 | 박소현


이번에는 본의 아니게 여러분을 괴롭히는 격이 되겠는데 앞으로 소개할 세 편의 만화는 현재로서는 구할 방도가 없다. 중고만화서점을 열심히 뒤지시거나, 10년 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만화방을 찾는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만화여야 하는 이유는 휴일 오후, 우연히 책장을 뒤지다 이 작가의 만화를 다시 읽게 되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고, 이 작가가 무척 기발한 스토리라인으로 깜짝 놀랄만한 반전에 능하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며 감탄한 것이 두 번째 이유다. (덕분에 늦은 밤까지 만화책과 씨름하며 즐거울 수 있었다.) 신일숙의 초기작으로 1988년부터 1990년 사이에 발표한 <199년생> <나의 이브> <카르마> 세편의 중․단편은 대표작인 <아르미안의 네딸들> <리니지> 등과 달리 짧은 호흡의 연재물로 타고난 이야기꾼인 그녀의 재능이 단편에서 어떻게 빛을 발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반전, 이를 뛰어넘는 놀라운 흡인력


20세기 말 지구는 첨단 과학기술로 무장한 외계인의 침략을 받는다. 몰락의 와중에 찾아온 희망은 소위 ‘1999년생’이라 불리는 차세대 인류의 초능력. 세계는 초능력자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소년 소녀들이 인류의 미래를 위해 싸운다. 한국인 혼혈아인 크리스탈 정은 전사로서의 뛰어난 감각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남성 혐오증 때문에 실전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 앞에 나타난 젊고 매력적인 로페스 교관. 처음 크리스는 같은 조의 남성 동료들 뿐 아니라 유능하지만 거만한 교관과 사사건건 부딪히게 된다. 크리스가 동료들의 신임을 얻고 로페스 교관과 사랑에 빠지기까지의 과정이 군더더기 없으면서도 풍부한 에피소드로 가득하다. 크리스에게 총을 맞으면서까지 키스를 시도하는 로페스의 과감한 애정표현은 그때도 지금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명장면.


그런데 만화를 읽다보면 의문점이 하나 생길 것이다. 기묘한 제목의 챕터 때문이다. 제 1장 벼락처럼 기억에 남는 만남, 제2장 완벽에 가까운 남성상, 제3장 하나의 인간으로서 능력을 인정할 것, 제4장 보통의 관계에서 굳어지지 않도록 이성적으로 적극적인 자세를 취할 것, 제5장 최후의 결점을 남긴다, 라는 제목의 비밀은 후반부에 가서 밝혀진다. 크리스에게 과감한 애정공세를 퍼부었던 로페스라는 인물 자체가 외계인의 실험으로 개조된 사이보그였다는 것, 그녀와 로페스의 사랑은 ‘아르테미스 사냥’이라는 이름의 6단계 게임이었다는 것. 그러니까 만화 도입부에서 그녀가 홀홀단신으로 외계인들의 비행접시에 침입해 그들을 격파한 것이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이란다. 만화 자체가 거대한 거짓말인 셈.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음을 연 남자가 그녀를 정신적으로 파괴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사람이었다니, 총체적인 음모와의 대면이다.


신화와 종교의 재해석


반복되는 전생의 업을 주제로 한 <카르마>는 신혜의 꿈에서 시작한다. 주인이 죽을 것이란 예언 때문에 매질을 당하는 소녀, 정신이상자 후작의 처가 되어 학대받는 여인, 무기상에게 납치당한 인디언 소녀. 꿈속에서 그녀는 매번 죽을 위험에 처하고 그때마다 한 일가-정확히 말하면 4명의 형제에 의해 목숨을 구한다. 끔찍한 기억은 그녀를 위협하고 급기야 정신과 치료까지 받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신혜는 어떤 운명적인 인도에 의해 한 일가를 만나고 그들이 전생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전생의 업은 현세에서도 반복되고 있었다! 자, 그렇다면 범인은 과연 누구일까? 그녀를 흠모하는 같은 과 선배? 아니면 평화로운 일가의 형제들 중 입양된 첫째? 혹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범행현장에 서 있는 셋째? 모두를 의심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일가의 사람들은 차례차례 죽임을 당한다.



후반부에 이르러 초점이 5명의 형제 중 과연 누가 입양된 사람인가에 맞춰져 있을 무렵, 범인은 의외의 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주인공을 치료했던 정신과 의사였다! 그가 선배에게 암시를 걸어 범인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아니, 이렇게 오밀조밀하게 스토리를 구상하다니 놀랍다. 신화나 종교에서 주로 모티브를 구해 이중 삼중의 의미를 넣고, 씨줄과 날줄을 복잡하게 엮어 독자가 감히 다음 전개를 짐작하지 못하게 하는 재능이 놀라울 따름이다.


구약성경의 천지창조를 모티브로 하여 SF물로 옮긴 <나의 이브>는 이기적인 창조자 야훼가 재미로 만든 인간(자신의 클론) 아담과 이브 사이에서 벌어지는 애증을 그린다. 단순하고 본능에 충실한 아담과 달리 지적이며 교활하기까지 한 이브. 창조자로서의 우월감을 느끼던 야훼는 훌쩍 성장한 이브의 여성미에 무릎을 꿇고 사랑의 포로가 된다. 그리고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이브를 위해 또 다시 클론을 만들던 중 그녀에게 들키고 만다. 이브는 연구실을 파괴하고 아담과 관계를 가짐으로써 그에게 복수한다. 야훼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우주로 떠난다. 몇 년 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이브는 카인과 아벨이라는 이름의 형제를 낳은 뒤 죽고 없었다.


성서의 구절을 재해석하면서도 원 내용에 위배되지 않게 한 것이 이 만화의 재미. 괴팍한 성격의 과학자로 분한 야훼와 그의 클론 아담과 이브. 결과적으로 영리한 이브는 호기심 때문에 자멸한 격이라는 것도 성서와 같다. 창세기전 첫 장의 사실관계는 변하지 않으면서 장르는 SF이고 내용은 이기적인 창조주의 불완전한 발상에서 시작된 총체적인 비극이라는 점이 흥미롭지 않은가. 이브와 야훼의 사랑까지 추가되었으니 이것 참 놀라운 일이다. 그녀의 마지막 눈물로 이브의 호기심과 복수가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다는 것도 반전이라면 반전.


한국 만화사를 통틀어 신일숙 만큼 신화와 종교에 매료되었던 인물도 드물다. 특히 그녀는 여느 순정만화 작가와 달리 감정의 묘사에 치중하지 않고 사건 중심의 빠른 전개를 즐기는데(상대적으로 소년만화가 이런 특징을 지니고 있다) 위 세 편의 만화처럼 장편보다 단편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작가가 만화 줄거리의 대부분을 꿈에서 보고 그린다는데 과연 꿈처럼 환상적이고 인상적이다. 모쪼록 앞으로도 많은 꿈을 꾸어 주었으면 좋겠다. 신일숙을 대체할 만화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사족 하나 달자면, 유난히 유통주기가 짧은 만화의 특성을 고려해 좋아하는 작가의 만화는 꼼꼼히 모아둘 필요가 있다는 말을 덧붙인다. 안 그러면 휴일 아침 오래된 만화를 뒤적이며 여유롭게 즐거움을 누릴 기회를 잃고 말테니.


* <1999년생>, 신일숙 글/그림, 팀매니아, 1995, 2권 완결
* <카르마>, 신일숙 글/그림, 팀매니아, 1995, 단편 완결
* <나의 이브>, 신일숙 글/그림, 서울문화사, 1995, 단편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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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23 11: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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